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마소 (문단 편집) === 초기 생애 === 238년 [[위(삼국시대)|위]]의 대신으로 신성향후(新城鄉侯)라는 지위를 받았다. 249년에는 사마의, 사마사와 함께 [[고평릉 사변]]을 통해 정권을 잡았다. 사마의는 모든 획책을 사마사와 함께 도모했는데, 이 과정에서 차남인 사마소는 완전히 소외당했다. 아버지와 형이 그의 능력을 믿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아버지와 형에게 전말을 듣게 된 것은 거사 바로 전날(!)이었다. 덕분에 사마사는 모든 준비를 끝내놓고 거사 전날에 마음 편히 자는데도 사마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마사가 [[하후현]]을 죽일 때도 눈물을 흘리며 구명을 요청하는 등 이때의 사마소는 훗날 황제 시해라는 대형사고를 칠 인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실재하는 그의 군 경력은 [[흥세 전투]]에 참전한 것을 시작으로, 북벌을 시도하는 [[강유]]와 교전하거나[* 이 기록은 진서에만 있고 촉서 강유전에는 없다. 또 진서에서 사마소가 곽회나 진태와 함께 대촉방면에 선 기록도 위서 곽회전이나 위서 진군전에 수록된 진태전에 없다. 심지어 진서에서 정서장군을 임시로 겸하며 옹주자사 진태와 함께 군사를 논하는 이야기가 실렸는데 진태전에선 곽회 사후 진태가 정서장군에 올랐다고 나온다. 진서의 사마소 군사경력 뻥튀기의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왕릉(삼국지)|왕릉]]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사마의의 출병에 동행하는 등 나름대로 군사 경험을 쌓아나갔다. 다만, 252년에 있었던 동흥 전투에서 그는 독회북제군사(督淮北諸軍事)로서 준 사령관급 위치에 있었으나, [[제갈각]], [[정봉#s-1|정봉]]과의 싸움에서 대패하고는 부하 왕의[* 왕수의 아들.]로부터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직언을 듣고는 격노하여 왕의를 처형하였다. 이후 동흥 전투 당시 동관에서 패전한 책임을 지고 작위 일부를 잃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