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마간(평원왕) (문단 편집) == 생애 == [[사마의]]와 [[장춘화]]의 막내 아들이며,[* 출생 연도를 따지면 '''사마의가 53세, 장춘화가 43세일 때 낳은 것인데''' 오늘날 기준으로도 이 시기에 낳은 아이는 늦둥이 취급을 받는 걸 생각하면 당시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늦둥이다.][* 여담으로 [[조조]]의 막내 아들 [[조간]]하고 이름이 같다.] 사마의의 전체 아들 중에서는 7남 혹은 6남이다. [[사마사]], [[사마소]]의 동복 형제로 [[사마량]], [[사마주]], [[사마륜]]의 이복 형제다. [[위(삼국시대)|조위]] 때 안양정후, 평양향후에 봉해지고 산기상시, 무군중랑장을 역임했다가 264년에 [[오등작]]이 부활하면서 정도백에 봉해졌으며, 265년에 (겨우 4살 어린) [[조카]] [[무제]] [[사마염]]이 [[서진]]을 건국하자 평원왕, 시중에 봉해지면서 1만 1300호의 식읍과 말 2마리를 하사받았다. 사마염은 함녕[* 275 ~ 280년이다.] 초기 봉국에 봉해진 제왕들을 일제히 봉국으로 보냈지만 사마간에게는 정신병이 있으면서 성격은 지극히 순수하고 욕심이 적었기 때문에 특별히 수도에 남겼다. 290년에 종손(조카의 아들)인 혜제 [[사마충]]이 즉위하자 좌공록대부로 승진했으며, 검리상전[* 검을 차고 대전에 입조할 수 있는 특권이다.]과 입조불추[* 대전에 입조할 때 종종 걸음으로 들어오지 않아도 되는 특권이다.]가 하사되었다. 사마간은 인사를 반드시 재능이 있는 사람을 뽑으면서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연달아 애첩이 죽자 관에 못을 치지 않고 빈 방에 두면서 며칠 동안 보기도 하고 [[시간(동음이의어)#s-2|시간]]을 행했다가 시체가 썩자 비로소 매장했다. 이복 동생 조왕 [[사마륜]]이 혜제를 보정하자 사마간은 위장군에 임명되었으며, 301년에 혜제를 폐위하고 사마륜이 스스로 즉위하자 제왕 [[사마경]]이 반발해 군대를 일으켰다. 이 때 사마간은 사마경에게 "조왕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그대가 천하를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은 공적이오. 하지만 아직 [[팔왕의 난|내란]]이 끝난 것이 아니니 그대는 조심하기 바라오"라고 주의를 줬으며, 결국 사마경이 사마륜을 패사시키고 혜제를 복위시키자 사마간은 시중, 태보가 되었다. 그러나 사마간이 예상했던 대로 사마경은 결국 302년에 성도왕 사마영 등에게 주살당하고 잇따라 [[팔왕의 난]]이 가속화하기 시작했으며, 306년에 동해왕 [[사마월]]이 팔왕의 난을 평정하고 권력을 잡으면서 회제 [[사마치]]를 옹립했다. 사마간은 그를 혐오하면서 문을 닫아 만나지 않고 은거 생활을 했으며, 결국 311년에 여든 살로 훙서하였고 유총이 낙양을 침공하면서 [[시호]]를 받지 못했다. 사마간의 장남 사마광(司馬廣)은 [[요절]]했으며, 차남 안덕현공 사마영(司馬永)이 뒤를 이었다. 사마영은 290년에 안덕현공에 봉해졌다가 산기상시가 되었지만 [[영가의 난]] 때 피살되면서 사마간의 대는 끊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