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리원시 (문단 편집) == 역사 == 본래 [[봉산군]]의 일부로 시 승격 이전에는 봉산군 사원면이었다. 이전의 역사는 봉산군 문서 참고. 사리원은 '-원([[院]])'이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 평양과 개성을 잇는 교통로 상에 위치한 교통 취락으로 발전한 곳이다. [[고려시대]]까지 평양과 개성을 잇는 주요 교통로는 [[자비령]]을 넘는 길이었지만, 조선시대에 자비령을 넘는 길을 폐쇄하고 서쪽의 동선령(洞仙嶺)을 넘는 길이 그 역할을 대신 맡게 되었다. 이때 동선령을 넘는 사람들이 동선령 남쪽 사리(沙里)에서 숙박을 많이 하게 되었고 이윽고 사리에 숙박시설인 원이 설치되어 '사리원'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이후 사리원은 교통의 요지로 번창하여 읍치인 동선면보다 더욱 번화하게 되었다. 유명한 [[봉산탈춤]]도 여태 전승되던 동선면이 아닌 사리원에서 열리게 되었다. 1905년 [[서울]]과 [[의주]]를 잇는 [[경의선]]이 사리원을 통과하고 1912년 동선면에 있던 봉산군청까지 사원면으로 이전하면서 사리원은 확고부동한 봉산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1921년 사리원면으로 개칭되고 1931년 사리원읍으로 승격되었다. 1945년 기준 사리원읍은 면적 31.77㎢, 12개 리로 구성되었다. 아래 이북5도위원회 행정구역 참고. [[8.15 광복]] 이후 북한 치하에서 1947년 [[시(행정구역)|시]]로 승격되어 봉산군에서 분리되었다. [[대한민국]]의 [[이북 5도]] 체계로는 1947년이 아니라 1945년 광복 직후에 봉산에서 떨어져 '사리원시'가 되었다고 간주한다.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사령부|유엔군]]이 북진 레이스를 벌리던 시점에 짧은 전투 후 사리원을 함락시켰는데, 이 때 잠시 [[대한민국]]에서 사리원시 임시 시장을 파견한 적도 있다.[* 전쟁 와중이라 관련 기록이 부족해서 누구를 사리원 시장으로 보냈는지가 안 나온다. 다만 [[중앙일보]]가 [[2019년]] 소설가 [[김진명]]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639698|인터뷰한 기사]]에 따르면 당시 임시로 파견된 사리원 시장이 김진명 작가의 조부였다고 한다.] 물론 [[중국 인민지원군]]이 밀고 내려오면서 사리원시를 다시 북한에 내주고 사리원 시장도 남쪽으로 피난갔다. 이 때문에 임기는 3개월이 채 못 됐다고... [[이북 5도]]에서 사리원을 별도로 관리하는 이유는 '''한국 정부에서 사리원 시장을 파견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문서로 남아있는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2022년 현재 이북 5도에서 사리원시와 [[송림시]]를 [[http://www.ibuk5do.go.kr/cont/201050.do|별도로 관리]]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파일:정방산.jpg]] 이북에 있는 데다가 딱히 잘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국사]]를 열심히 공부했다면 [[고려]] 시대 다포식(多包式) 건축 양식을 보전[* [[조선]] 시대 중수는 했으나 양식은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다고 한다.]하고 있는 응진전이 있는 [[성불사]]가 부근[* 성불사는 광복 직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주군]] 주남면 정방리, 북한 행정구역상으로는 봉산군 정방리에 위치한다.]에 있음을 알 것이다. 참고로 이 성불사가 가곡 <성불사의 밤>의 무대로 알려져 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지금도 북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리원의 관광명소로 성불사가 아주 유명하다고 한다. 성불사를 보호하듯이 두르고 있는 정방산성 역시 고려 시대에 세워지고 조선 후기 [[김자점]]이 대대적으로 보수한 12km 규모의 거대한 산성으로, 전근대 시기 황해도 최대의 군사 거점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김자점이 5천여 병력과 주둔했으나, 청나라 군대가 산성들을 모두 무시하고 한성으로 바로 진격하면서 무력화되었다. 정문격인 남문 정방루[* 현재의 건물은 6.25 당시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인근 성벽은 7~9m에 달하 위용을 자랑하고, 치성과 곡성 및 4개의 장대를 갖추고 있다. 성벽의 성가퀴 및 여장도 잘 남아 있으며, 총안과 사혈용 구멍이 무려 6천여개나 있다. 북한의 국보 89호로 지정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