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도세자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1735년]]([[영조]] [[1735년|11년]]) [[음력|음]][[1월 21일]], [[영조]]와 [[후궁]] [[영빈 이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영조]]는 장남 [[효장세자]]를 7년 전에 안타깝게 잃고 다른 아들을 두지 못한 상태였고 '''42세'''의 고령에 사도세자를 낳았으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도 당시 40세였다. 조선 시대의 40세는 손주를 보아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이 때문에 [[영조]]는 어렵게 얻은 [[늦둥이]] 왕자의 탄생을 당연히 매우 기뻐했다. 조선 시대에는 [[환갑]]도 동네에서 잔치를 열어 줄 정도로 드물었고 70대는 나라에서 명예 벼슬을 내리고 해당 인물이 [[천민]]이라면 [[효자]]라고 자녀가 면천될 정도로 적었다. 10대에 결혼하고 20대에 출산해 40대면 손자를 보고 50대쯤에 죽는 게 자연스러웠던 시대였다. 더군다나 조선 국왕들의 평균수명이 '''47.1세'''였다. 그러므로 당시 42세였던 [[영조]]도 자신이 곧 노년이 된다고 보았고 그리 오래 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영조는 어릴 때부터 약을 달고 살 정도로 허약체질이었으며 성년이 되어서도 병치례가 잦았다. 그러니 자기가 40대까지밖에 살 수 없다고 비관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조는 무려 '''83세'''까지 장수하여 [[조선/왕사|조선 역사]]상 '''최장수 군주'''로 기록되었고 이는 사도세자에게 크나큰 불행이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1735년|태어난]] 즉시 정실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법적아들)로 공식 입적한 후 '원자(元子)'로 정했고 이듬해인 [[1736년|영조 12년]]([[1736년|1736]])에는 '''이제 막 [[돌]]이 지난 원자를 [[왕세자]]로 정식 책봉했다.''' 영조는 갓난 세자에게 기대가 너무 커서 세자가 읽을 책을 임금인 자신이 직접 꼬박 밤 새 가면서 [[필사]](筆寫)[* 깨끗한 새 책에 똑같이 베끼는 것. 새책에 공부 열심히 하겠지 하는 영조의 지극정성한 마음이 여기에 담겨 있다.]했고 [[성균관]]의 탕평비도 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해서 특별히 제작했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젖먹이인 어린 나이에도 유달리 매우 총명한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태어난 지 4달 만에 스스로 기었고 6달 만에 영조의 부름에 어느 정도 대답을 할 수 있었으며 7달 만에 동서남북을 분간했고 2살에 [[천자문]]을 배워 60자를 써내었다. 3살에 [[다식]]을 받자 수([[壽]]) 자, 복([[福]]) 자가 박힌 [[과자]]는 먹고 [[팔괘]](八卦)를 박은 것은 먹지 않았는데 이에 [[궁녀]]들이 "잡수소서"라고 권하자 "팔괘는 [[우주]]의 근본이니 아니 잡숫겠다."라고 대답하였으며 팔괘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복희(중국 신화)|복희]]를 그린 책을 보고 "높이 들라."라고 하고 절을 올렸다고 한다. 5살 때는 밥을 먹던 중에 아버지 [[영조]]가 말을 걸자 입에 있는 밥을 전부 뱉고 답한 적도 있다고 한다. 왜 음식을 뱉었는지 영조가 묻자 어린 세자는 '''"[[소학]](小學)에서 '부모가 부르실 때는 입에 있는 걸 뱉고 말하는 게 효(孝)'라고 배웠습니다"'''라고 답했다. 말하자면 [[김시습]] 수준의 천재이었다. [[천자문]]을 배우던 중에 '''사치 치([[侈]])''' 자와 '''가멸 부([[富]])''' 자에 이르자 '치'자를 집고 다시 자신이 입은 옷을 가리키며 "이것이 사치라"라고 하였으며 영조가 어릴 때 쓰던 [[감투]] 중에 칠보로 장식된 것을 씌우자 "사치!"라고 거부했고 돌 때 입은 옷을 입히려고 하자 역시 "사치하여 남 부끄러워 싫다."고 거부했다. 이에 세자를 모시던 나인들이 과연 세자가 알고 말하는가 모르고 말하는가 궁금하여 [[비단]]과 [[무명]]을 놓고 "어느 것이 사치고 어느 것이 사치가 아니나이까?"라고 묻자 세자는 비단을 집어들고 "이것은 사치라."라고 하더니 무명을 집고는 "무명은 사치 아니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나인들이 "어느 것으로 옷을 지어 입으시면 좋으리이까?"라고 묻자 무명을 가리키며 "이것을 입어야 좋으리라."라고 답하였다. 이것은 [[한중록]]에 나온 이야기지만 [[영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런 기록들은 과장이 아니라도 어느 정도 세뇌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고 한다.[* 영조가 살아생전 검소를 실천하고 강조한 만큼 내인들이 세자에게 이것을 가장 먼저 가르쳐줬을 것이다.] >[[영의정]] 이광좌: 신(臣)들이 어제 [[왕세자|동궁]](東宮)을 뵈었는데 어린 나이에 예모(禮貌)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으니, 경사스럽고 다행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3세에 [[영조|주상 전하]] 앞에서 경서(經書)를 강독(講讀)하고 논(論)하는 것은 너무 이른 것을 면치 못하니, 오직 바라건대, 빨리 덕성(德性)을 함양해 온화(溫和)하고 문아(文雅)함이 날로 성취(成趣)되게 하소서." > >[[영조]]: "경(卿)의 말이 옳다. 근일(近日)에 문왕장(文王章)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일찍이 명주와 무명베를 보고 사치(奢侈)와 검소(儉素)를 구분하여 무명옷 입기를 직접 청했으니''', 매우 기특하다. 만약 잘 인도(引導)한다면 성취(成趣)할 것을 바라겠으나, [[영조|나는]] 본래 학문이 없으니[* [[영조]]는 본디 천민에 준하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의 아들에 이미 세자로 형 [[경종(조선)|경종]]이 있어서 유년 시절부터 제왕 교육과 동떨어졌지만, 그는 엄청난 공부벌레였기에 아들의 똑똑함을 더 돋보이게 하려고 일부러 자신을 낮췄다고 보는 것이 맞다.] 오직 경(卿)들이 잘 이끌어주길 바랄 뿐이다." >---- >영조 45권, 13년([[1737년|1737]], 정사년 / [[청나라|청]] [[건륭제|건륭(乾隆)]] 2년) [[9월 10일]](을미) 1번째 기사 과장이 섞였을 수도 있지만 상당히 총명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영조]]도 어린 세자를 몹시도 귀여워하며 대신들을 불러 한 번씩 직접 안아보게도 하고 세자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신하들에게 나눠주게 하는 등 세자를 무척이나 총애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조]]는 이렇게 총명한 세자에게 인생에 있어 큰 화가 될 법한 결정을 했는데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세자를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와 떨어뜨려서''' [[선의왕후 어씨|선의왕후]] 어씨[* [[경종(조선)|경종]]의 계비]가 살던 [[창경궁 저승전|저승전(儲承殿)]]에 머물게 하고 [[경종(조선)|경종]]과 [[선의왕후]] 내외를 모시던 [[소론]]계 [[궁녀]]들[* [[경종(조선)|경종]]이 당시 이복동생 연잉군, 즉 [[영조]]에게 생감과 간장게장을 드시게 하여 돌아가시게 하였다는 것을 믿는 작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을 사도세자의 시중 및 수발을 들게 하였으니 어린 세자가 장성해 가면서 아버지 [[영조]]와 [[노론]] 세력들이 나쁘다고 배울 게 뻔하였을 것이다.]에게 세자의 시중을 들게 한 것이다. 저승전은 [[1730년]]에 [[선의왕후]]가 죽은 후 오랫동안 비어 있었고 근처에 '''[[희빈 장씨]]'''가 머물면서 [[인현왕후]] 민씨를 죽게 저주한 것으로 유명한 취선당(就善堂)이 있었다. 그런데 영조는 취선당을 소주방으로 삼아 그곳에서 세자를 위한 음식을 만들게 했다.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는 자서전 [[한중록]]에서 이것들이 남편(사도세자)을 망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한참 부모인 [[영조]], [[영빈 이씨]]의 손길이 필요한 아기를 품에서 떨어트려 불길한 곳인 저승전, 취선당에서 따로 키우게 했다. [[영조]] 입장에서는 이복형 [[경종(조선)|선왕]]을 모시던 소론 출신의 궁인들로 하여금 세자를 모시게 하여 세자의 권위를 세워주고 [[경종 독살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나름대로 자신이 [[조선/왕사|왕위]]에 오르는 데에 정당성이 있음을 증명하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이 궁인들은 워낙에 친(親) [[소론]](경종 지지) 성향이었다. 원래 궁인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상전과 친한 당파와 친해지는데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자신이 누구를 모시는지가 권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선조(조선)|선조]] 시절에는 "[[광해군]]이 폐세자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소성대비]]([[인목왕후]])를 모시는 대전 나인들은 물론이고 [[후궁]]을 모시는 나인들까지 광해군을 모시는 동궁 나인들을 대놓고 괄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경종(조선)|경종]]을 모시던 궁인들은 [[숙종(조선)|숙종]] 말엽에 경종의 입지가 흔들리자 대놓고 [[노론]]이 지지하는 [[연잉군]]을 모시던 궁인들에 비해 기를 펴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더더욱 [[소론]] 성향이 되었다.[* 훗날 [[삼수의 옥]]의 서막을 올리는 대리청정 소동 때 [[노론]] 도승지 홍계적이 장악한 [[승정원]]에서 [[소론]] 신하들의 알현 요구와 상소를 모조리 물리치고 중상모략을 시도하자 소론파 궁인들은 경종에게 소론 신하들의 입궐을 알려 우상 조태구 등이 경종을 직접 알현해 만나게 하기도 했다.] 그래서 영조의 뜻과는 다르게 소론 궁인들은 [[왕세자|동궁]](東宮)에서 여러가지 크고 작은 분란을 일으켰다. [[한중록]]에 따르면 그들의 리더격인 최 상궁과 한 상궁이 그 일의 큰 원흉인데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어릴 적만 생각하고 그녀를 업신여기며 세자를 자주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영빈 이씨|영빈]](英嬪)이 비록 세자를 낳기는 했으나 사친(私親)이다. 신분상으로 군신(君臣)의 관계가 있으니 [[영조|주상]]을 자주 만나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영조|주상]]을 뵈올 때도 반드시 빈어(嬪御)가 정전(政殿)을 배알(拜謁)할 때 쓰는 까다로운 예절로써 구제(具制)를 가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 되자 [[영빈 이씨|영빈]]은 그곳을 자주 갈 수가 없어 혹은 하루에 한 번이나 하루 걸러서, 혹은 며칠 걸러서 한번 가고 혹은 1달에 한두 번밖에 못 갈 때도 있었다. >---- >[[융건릉|헌륭원]] 지문 中 [[한중록]]만의 기록은 아니다. [[정조(조선)|정조]]가 쓴 [[융건릉|헌륭원]](顯隆園) 지문에도 나온다. 실제로 [[영빈 이씨]]는 출신이 미천해 한중록을 토대로 유추하면 6세에 궁궐에 들어와 [[궁녀]]가 되었, [[숙종(조선)|숙종]]의 대전에서 일하다가 [[영조]] 즉위 후에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눈에 들어서 영조의 후궁이 되었다. 그러니 [[경종(조선)|경종]]을 모시던 궁녀들에겐 영빈이 하찮게 보였을 수도 있다. 실제로도 세자를 직접 낳은 어머니(생모)는 영빈 이씨라도 세자가 되면서 영조의 정실, 즉 중전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에 세자의 법적 어머니는 [[정성왕후]]다. [[혜경궁 홍씨]]는 궁인들에게 문제가 또 있었다고 지적했다. 세자에게 병정놀이, 삼국지나 무인 기룰잡서 등을 익히게 하고 한 상궁이라는 보모는 직접 칼, 활 등을 만들어 세자에게 바쳤다는 얘기도 있다. 이렇듯 공부를 멀리하고 무예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조]]는 이런 것들을 제공한 주변인들을 조진 적도 있었다. 실제로 동궁의 궁인들이나 세자시강원의 기강에 여러 문제가 있었던 건 [[승정원일기]]에서도 나온다. 세자시강원의 조라치[* [[나각]]을 불던 궁중 나팔수.] '박금돌'이라는 자가 세자가 환궁할 때 술에 취해서 행패를 부리다가 취조받은 사건도 있었고 송인명이라는 대신이 "동궁에 선량하지 않은 자나 말을 남들에게 함부로 옮기는 자가 있으면 안 되니, 궁인을 고를 때 선량한 자로 잘 골라야 하고, 궁 안의 어떤 일이든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라고 충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박문수]]가 "세자의 나이가 어리니 내관들이 나쁜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충고하고 의관 김수규가 세자에게 유용목(愉用木)이라는 놀이기구를 바쳤다가 적발되어 문책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의 성장 배경과 궁인들의 행적은 "이후 사도세자가 친[[소론]] 성향을 걷게 된 이유"라는 떡밥의 원인이 되지만 후술하겠지만 사실이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