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대주의 (문단 편집) ==== [[고구려]] ==== * [[고구려-수 전쟁]]을 이끈 [[영양왕]]은 [[문제(수)|수문제]]에게 자신을 [[영양왕#s-2.2.1|'요동이라는 똥땅에 있는 신하 아무개(遼東糞土臣某: 요동분토신모)']]라 하며 선제 침공한 것을 사과하자 [[문제(수)|수문제]]는 분노를 풀고 작위를 회복하여 주었으며[* 이런 행동은 [[나당전쟁]]에서의 신라와 비슷하다. --병주고 약주고-- 그만큼 사대라는 행위는 단순 겉치레일 뿐이라는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수전쟁에서 활약한 [[영류왕]]은 전쟁은 승리했음에도 고구려 영토 한복판에서 벌어진 난리통에 대한 염증을 느꼈는지 피해 회복 기간을 갖기 위해 [[태종(당)|당태종]]에게 [[영류왕#s-2.2|화친 정책을 펼쳤다.]][*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외교를 논했던 고구려가 왜 이러냐고 할 수 있지만, 독자 연호를 채택하며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던 고구려는 당시 [[광개토대왕]]부터 [[문자명왕]]으로 이르기까지 국력 최전성기였고, 중국은 [[오호십육국시대]]라는 분열기로 국력이 약해진 특수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영양왕]] 시기의 [[고구려]]는 최전성기에서 내려와 있었던 반면 [[문제(수)|수문제]]와 [[태종(당)|당태종]]의 [[수나라]]와 [[당나라]]는 중국 대륙을 재통일하여 한창 국력이 상승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시기에도 북조에 대한 형식적인 사대는 지속하였다. 고구려의 영웅적인 항전이 워낙 부각되어 현대인들이 잘 모를수도 있지만 일단 고구려도 중국을 대하는 자세 자체는 기본적으로 사대였다. '[[태왕]]'이라는 독자 칭호와 '[[영락]]'이라는 독자 연호를 쓰는 동시에 [[외왕내제]]를 하는 형식으로. 2000년대 드라마에서 연출한 것 처럼 영양왕이나 장수왕이 서토 오랑캐 정벌을 대내외로 부르짖지는 않았다. '명분은 상대에게 넘기는 대신 실리는 내가 챙긴다'는 기본적인 의도는 조선에서의 사례와 비슷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다시 [[중화제국|통일 왕조]]인 [[수나라|수]], [[당나라|당]]이 들어서자 고구려를 위협으로 느끼고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영토 일부가 [[한사군]]의 옛 땅임을 명분으로 하여 고구려를 침공했을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