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나(예멘) (문단 편집) ==== 지방 정권들 ==== 한편 9세기 중엽, 압바스 조의 쇠퇴를 틈타 예멘 동부 내륙에서 흥기한 유피르 왕조는 종종 사나로 세력 확대를 꾀하였다. 841년 유피르 군의 사나 공격은 그 총독이 이라크의 압바스 정규군을 지원받아 격퇴하였다. 다만 압바스 군의 카우카반에 대한 반격 역시 실패하였다. 이후 압바스 조가 사마라의 혼란에 빠진 틈에 869년 유피르 조는 사나를 정복하였다. 876년 대홍수가 발생해 사나의 시가지가 침수되었다. 후에 재건되긴 했지만 대사원 역시 큰 피해를 입었고, 유피르 조의 군주 무함마드 이븐 유피르는 [[메카]]로 속죄 목적의 순례를 떠나기도 하였다. 비록 유피르 조가 중시하긴 했지만 수도는 여전히 위태로운 사나 대신 내륙의 시밤으로 남았다. 880년대의 반란들로 사나는 불안정한 시기를 맞았고, 곧 세력을 회복한 압바스 조가 지배권을 회복했지만 그 총독인 아불 아타히야는 899년 유피르 조에 복속하였다. 한편 897년 사나에서 북서쪽으로 120여 km 떨어진 [[사다]] (쑤드하)에선 후에 도시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될 쉬아 계열의 [[자이드파|자이디]] 이맘국이 세워졌다. 그 초대 이맘인 알 하디 야흐야는 901년 1월 19일 사나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내 건강이 악화된 알 하디는 902년 5월 들것에 실려 사다로 돌아갔다. 이듬해 회복한 알 하디는 재차 사나를 공격했지만 유피르 군에게 패배하였고 그 아들 무함마드가 포로가 되었다. 901년과 913년 사이에 사나는 20번 정복되고, 3번은 협상을 통해 항복하고, 그외에 5번은 포위를 격퇴하는 등 혼란기를 보냈다.[* 901.1 / 902.5 / 903 - / 905.11 / 906.4 / 906.11 / 910.4 / 910.6 / 911] 한편 알 하디는 예멘의 유일한 쉬아 지도자가 아니었다. 이미 881년부터 [[이스마일파]] 선교사들이 예멘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그 선교사 (다이)들인 이븐 하우샵과 알리 이븐 알 파들이 각각 사나의 서북쪽과 [[아덴]] 북쪽의 산지에서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중 알리는 905년 11월 사나를 정복하였고, 비슷한 시기 이븐 하우샵은 시밤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사다의 자이디 이맘국을 제외한 예멘 내륙 지방 대부분이 파티마 조에 충성하는 이스마일파 세력의 소유가 되었다. 비록 906년 4월, 알리에 반감을 품은 부족들의 초대로 알 하디는 재차 사나를 점령하였으나 곧 유력자인 아사드 이븐 아비 유피르와 다툰 후 같은해 11월 도시를 떠났다. 이후 이스마일파가 재차 사나를 장악하였다. 910년 4월 7일, 알리가 서부 저지대로 원정을 나선 틈에 알 하디는 재차 사나를 점령하였으나 6월 23일 재차 물러나야 했다. 911년에 사나는 이스마일파 극단주의 세력인 [[카르마트]]의 습격을 받았다. 이때 대사원이 파괴되는 등 도시에 큰 피해가 유발되었다. 그동안 내륙에서 세력을 재정비하던 유피르 조는 마침내 916년 이스마일파로부터 사나를 점령할 수 있었다. 한편 이스마일파와의 일전을 준비하던 자이디 이맘 앗 나시르 아흐마드는 함단, 나즈란, 카울란 부족을 모아 그 지도자인 압둘 하미드와 사나 외곽에서 3일간 전투를 벌였다. (누가쉬 전투, 920년 1월) 결과는 압둘 하미드가 전사하는 등 자이디 연합군의 대승이었고, 예멘에 대한 이스마일파의 지배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리고 10세기 중반 유피르 조는 내분으로 쇠퇴하였고, 956년 자이디 이맘 알 무크타르가 도시를 점령했다. 다만 그는 같은해 함단 부족에게 암살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