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나(예멘) (문단 편집) ==== 자이디-오스만 전쟁 ==== 19세기 후반 사나에는 카심 왕가의 방계인 무함마드 이븐 야흐야 하미드 앗 딘이 살고 있었다. 1839년 사나에서 태어난 그는 자이디 종교 학자로 성장하였고 1876년 오스만 당국과 마찰을 빚은 후, 그에 의해 다른 사나의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호데이다로 유배되었다. 2년간의 유형 후 사나로 돌아온 무함마드는 이맘 알 하디의 누이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1890년 알 하디가 사망했을 당시 오스만 당국의 탄압으로 마땅한 후보감이 없던 차에 그는 울라마에 의해 이맘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사나를 떠난 무함마드는 1890년 7월 사다에서 이맘위에 올랐다. 그의 정식 칭호는 알 만수르 빌라 아흐마드 앗 딘 무함마드였다. 알 만수르는 돈과 곡식을 분배하여 울라마의 지지를 얻었고, 북부의 부족들에게 서신을 돌려 대오스만 항쟁 동참을 촉구하였다. 대부분의 부족들이 이에 호응하자 1891년 알 만수르는 세력을 규합하여 거병하였다. 그해 핫자와 다마르가 점령되었고 1892년에는 실패로 귀결되었지만 총독부가 있는 사나 자체도 잠깐 포위하였다. 실정으로 민심을 잃어가던 오스만 당국의 영향력은 점차 축소되었다. 오스만 측은 군사 개입으로 실지를 수복할 수는 있었지만, 민중에 대한 이맘의 영향력 확대는 막을 수 없었다. 자이디 부족들의 치고 빠지기 전술은 오스만 군대를 소모시켰다. 1891년과 1896년 오스만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는 알 만수르에게 서면으로 좋은 관직을 대가로 복속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이맘은 그의 목적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이 아닌, 샤리아를 적용하고 부조리를 바로잡는 것이라며 거절하였다. 예멘인들에게 그는 세속적이고 서구에 물든 터키인들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수호자로 인식되었다. 한편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자 알 만수르는 대부분의 북부 부족들 사이의 관습법을 폐지하고 신앙의 전사들을 위한 봉급과 과부, 고아, 교사들을 위한 기부의 재정비를 통해 카심 왕조 때의 전통적인 지배 체제를 회복하였다. 전쟁은 1898년 재개되었으나 큰 규모의 전투는 없었다, 그러던 1904년 6월 알 만수르는 샤라하 부근의 카플라트 아다르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로서 이맘위에 오른 '''알 무타와킬 야흐야'''는 대규모 전쟁에 나섰다. 1904년 말엽 자이디 군대는 각지에서 발생한 봉기와 함께 다마르, 야림을 점령하였다. 동시에 사나와 그 외항 호데이다 간의 교통로와 전선을 차단한 후 12월 12일에는 사나를 포위하였다. 도시를 구원하기 위한 오스만 원군은 반복적으로 매복에 당해 분쇄되었고, 1905년까지 오스만측 사상자는 2만 5천을 상회하였다. 그해 봄 자이디 군대는 핫자, 마나카, 이브, 카타바 등을 함락하였고 사나는 6개월간 고립된 끝에 1905년 4월 항복하였다. 알 무타와킬은 사나의 오스만 수비대를 살려주는 조건으로 휴전을 요구하였다. 우선 1년 휴전이 성립되었고, 6월부터 협상이 개시되었는데 지지부진하였다. 그러던 8월 오스만 군이 휴전을 파기, 진군하여 사나를 수복하였다, 이후 야림, 이브, 아므란, 카우카반, 툴라 등이 오스만 군에게 점령되었다. 오스만 당국은 여세를 몰아 반군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사다의 관문 샤라하까지 진군했으나 험준한 지형과 게릴라에 막혀 철수하였다. 알 무타와킬이 반격에 나서자 오스만 군은 남쪽 타이즈까지 도주하였다. 오스만 측의 전진 기지들을 일소한 자이디 군은 1905-6년 겨울에 재차 사나를 봉쇄하였다. 그러나 호데이다에서 재정비한 오스만 군이 재차 반격에 나서자 알 무타와킬은 다마르, 야림, 아므란, 카우카반, 핫자, 앗 타윌라 점유 조건의 휴전을 제안하였다. 사실상의 고지대 분할안에, 전쟁에 지쳐있던[* 1904년부터 1911년까지의 반란은 오스만 조에게 매년1만 병력과 50만 파운드를 소모하게 하였다. 쇠퇴하던, 그리고 빚더미에 앉아 있던 제국에게는 큰 부담일 수 밖에 없었다.] 오스만 당국 역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1906년 8월 오스만 사절단의 이맘 방문을 시작으로 협상은 5년간 지속되었다. 협상의 진척에 불만이던 알 무타와킬은 1911년 다시 공세에 나서 1월 12일 사나를 기습 점령하였다. 다만 다른 부족들의 비협조로 곧 철수하였고, 그해 6월부터 비밀 협상에 임한 끝에 10월 18일 다안 협정이 체결되었다. 자이디 이맘국은 칼리파[* 정확히는 전부터 자이디 이맘들이 '아미르 알 무미닌' (신도들의 사령관)을 칭한 것을 포기한다는 것] 칭호를 포기한 채 오스만 조의 제후국으로써 점령지를 지배하고, 오스만 영토 중에서도 저지대 샤피이 지역 외에는 전통적인 샤리야가 적용된다는 내용이었다. 1913년 이스탄불 조정이 협정을 비준, 이로써 30년간 이어지던 자이디-오스만 전쟁은 평화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쇠퇴하던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 1911년 9월 이탈리아의 리비아 침공으로 인해 유발된 양면전선을 유지하기 부담스러웠고, 예멘의 고산지대 보다는 지중해권인 리비아의 트리폴리가 훨씬 중요했다.] 이는 튀르크 제국에 대한 아랍의 첫번째 온전한 승리로, 3년 후 '아랍 대반란'의 전조로도 여겨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