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나(예멘) (문단 편집) ==== 사나 '코뮌' ==== [[파일:예멘 사나 6.jpg|width=700]] 사나 구도심의 중심인 밥 알 야만과 대사원 일대 1852년 알 하디의 축출 이후 사나 시민들은 셰이크 아흐마드 알 하이미를 왈리로 하는 자치 정부를 세웠다. 공석으로 남은 이맘위에 대해 이듬해 울라마는 카심 가문 밖의 알 만수르 무함마드를 선출하였다. 하지만 그 역시 얼마 못 가 주민들에 의해 축출되었고, 알 만수르는 도시를 나서며 그들을 저주하였다.[* 한편 본거지 와딜 시르로 돌아간 알 만수르는 1890년 사망 시까지 이맘을 칭하였다.] 그 때문인지 사나는 여러 재앙에 직면하였다. 가축과 포도에 병이 퍼졌고, 1854년에는 사나 자체에 역병이 엄습하였다. 이후 안정을 되찾아가던 사나는 다시 자이디 이맘들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1858년 이전에 축출되었던 알 하디가 사나로 돌아오려 했으나 시민들에게 입성을 거부당하였다. 이에 그는 도시를 포위했으나 격퇴되었고, 왈리 알 하이미의 명목상 복속에 만족해야 했다. 이듬해인 1859년, 알 하이미의 실정에 지친 시민들은 그의 암살을 계획하였다. 알 하이미는 도시를 탈출하여 해안의 오스만령으로 향하였으나 현지 부족들에게 붙잡혀 카우카반 서쪽 앗 타윌라에 웅거하던 이맘 알 만수르 알 후세인 3세에게 넘겨졌다. 그후 알 만수르는 무정부 상태이던 사나를 점령, 도시는 7년만에 이맘에 의해 통치되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맘의 귀환을 반기지 않았다. 감금된 알 하미미의 선동으로 일어난 군중 폭동에서 하라트 알 필라이히에 있는 이맘의 저택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일련의 혼란 후 1860년 알 만수르는 사나에서 축출되었고, 내전에 지친 사나의 주민들은 자치를 선포한 후 셰이크 무흐신 무이드를 왈리로 선출하였다. 무흐신은 비 카심 계열로, 1855년부터 이맘을 칭하며 산간 요새에 웅거하던 알 무타와킬[* 13세기 말의 이맘 알 무타와킬 알 무타하르의 15대손으로 샤하라 출신.]을 이맘으로 인정하였다. 1863년 알 무타와킬은 알 만수르를 격파하며 입지를 다졌다.[* 이후 사실상 은퇴한 알 후세인은 1872년 오스만 총독 아흐마드 무크타르 파샤가 사나에 입성할 때에 동행한 원로 중 한명이었다. 그러고 16년 후 그는 사나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무흐신이 그를 견제하였고, 양측의 불화로 이어졌다. 알 무타와킬은 1867년 무력으로 사나를 점령했으나 적대적인 분위기에 곧 물러났고, 이듬해 쿠트바에 언급되는 조건으로 무흐신과 화해하였다. 알 무타와킬은 사나 부근의 이스마일리 마크라마 세력을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도시는 그들의 약탈에 시달렸다. (1870년경) 이로써 알 무타와킬에 대한 사나의 여론은 냉랭해지자, 무흐신은 그 대신 알 하디를 이맘으로 모셨다. 사나의 독립된 지위는 20여년의 실험 끝에 외세의 개입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