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나(예멘) (문단 편집) ==== 혼란의 재림 ==== 그 무렵 카심 왕조의 세력은 미약하였다. 호전적인 부족들은 점점 더 많은 보조금을 요구하였고, 1818년 알 마흐디가 바클리 부족의 사절단을 홀대하자 이들은 사나를 함락하고 22일간 약탈하였다. 알 마흐디가 12만 리얄 납부를 약속한 후에야 그들은 철수하였다. 다만 같은해 티하마를 정복한 오스만 군은 이맘이 이스탄불 궁정으로 커피를 보내는 대가로 일대를 돌려주었다. 한편 1820년, 그 3년 전에 영국인 장교가 현지인들에게 박대받은 것을 핑계로 영국군은 모카를 공격하였다. 이듬해 알 마흐디는 모카의 영국 상관에게 관세 완화를 약속하였지만, 이미 항구는 아덴에게 밀려났다.[* 영국인들은 모카 대신 아덴에 더 큰 잠재력을 발견하곤 1839년 그곳을 점령하였다. 이후 모카는 쇠퇴하고 사실상 버려진다.] 1832년에는 오스만 군에서 이탈한 일단의 튀르크 군단이 티하마로 남하, 모카와 호데이다를 점령하였다. 이듬해에 영국의 승인으로 메흐메트 알리의 이집트 군이 개입하여 모카를 점령한 후 약탈하였다. 그후 현지인들과 충돌한 이집트 군은 1837년까지 예멘 서해안을 평정하였다. 무력하게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국토 보전을 할 수 없다고 여긴 알 마흐디는 메흐메트 알리에게 나라를 넘길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하였다. 1835년 11월 알 마흐디가 사망할 당시 카심 왕조는 허상에 불과하였다. 그를 계승한 아들 알 만수르 알리 2세는 애주가로서 이맘의 자격조차 없었다. 1836년 사나를 방문한 영국인 크루텐든과 후르톤은 4년간 비가 내리지 않은 이유로 도시는 기근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다고 기록하였다. 1837년 알 만수르가 사나의 군부에 의해 폐위되고 친척이자 사나의 한 사원의 이맘이던 앗 나시르 압둘라가 집권하였다. 당시까지 예멘 서부는 이집트 지배 하에 있었고, 앗 나시르는 출두하여 사나를 내놓으라는 메흐메트 알리의 명을 거절하였다. 앗 나시르는 사나 서쪽의 타이비 이스마일파를 탄압했는데, 이에 하라즈의 타이비 세력이 자립하였고 이맘 본인도 1840년 그들에게 암살되었다. 그후 알 만수르의 조카 알 하디 무함마드가 이맘이 되었는데, 1840년 이집트 군은 예멘에서 철수하였다. 이듬해 알 하디는 모카와 타이즈를 수복하였지만 이미 많은 시민들이 안정을 찾아 영국령 아덴으로 또난 상태였다. 그는 영국에게 실지 회복을 위한 원조를 청했으나 거절되었다. 1844년 알 하디가 사망하자 알 만수르가 복위하였다. 그는 오스만에 복속한 티하마를 공격하여 몇몇 승리를 얻었으나 와병과 숙부 알 카심의 반란으로 철수하였다. 1845년 친척 무함마드 이븐 야흐야가 티하마 군대와 사나 앞에 나타나자 주민들은 성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알 만수르를 재차 폐위하며 이맘이 되었다. (알 무타와킬 무함마드) 그와 총리 아부 지야드 빈 하산은 사나의 유대인들을 크게 박해하였고 거금을 내놓을 때까지 고문을 가하였다. 1847-48년 알 무타와킬은 기존 동맹이던 티하마를 공격, 그 파샤인 샤리프 후세인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자비드, 모카 등이 수복되며 카심 왕조는 중흥기를 맞는듯 하였다. 그러나 샤리프 후세인이 감금지에서 탈출, 타이비 세력의 도움으로 자이디 군을 격파하고 내통자를 통해 모카를 점령하였다. 알 무타와킬 역시 1848-49년 타이즈와 야림을 점령하며 반격하였다. 그러던 1849년 4월 오스만 군이 호데이다에 상륙, 샤리프 후세인을 항복시켰다. 오스만 사령관 텝피크 파샤의 소환에 알 무타와킬 역시 그곳으로 향하여 오스만 제국에 복속하기로 서명하였다. 1849년 7월 15일, 그는 튀르크 군과 함께 사나에 입성하였다. 그 다음날 맹렬한 군중 봉기가 일어나 수백의 튀르크 인들이 살해되었다. 중상을 입은 텝피크 파샤는 곧바로 알 무타와킬을 공모 혐의로 폐위하고 알 만수르를 복위시켰다. 25일 후 튀르크 군은 호데이다로 철수하였다. 투옥되었던 알 무타와킬은 그해 12월 11일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 오스만 군대가 철수한 후 사나의 혼란은 극에 달하였다. 알 만수르의 억압적인 재상 알 미스리에 분노한 사이디, 카디들이 사나를 떠나 옛 수도 사다에서 알 만수르 아흐마드를 이맘으로 세웠다.[* 10세기 중반의 이맘 알 만수르 야흐야의 23대손인 그는 17세기 이래로 카심 가문원이 아닌 유일한 이맘이다.] 1850년 알 만수르 아흐마드는 사나를 포위했는데, 도시의 귀족들은 알 만수르를 폐위하고 다른 이맘 알 무아야드 압바스를 추대하였다. 두 이맘들간의 공성전이 이어졌고, 시타델에서 농성하던 알 무아야드는 결국 항복하였다.[* 1851년 그는 이맘 주장을 내려놓고 학자로 은퇴하였다.] 하지만 재정 파탄으로 군대의 봉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던 알 만수르 아흐마드는 알 만수르가 하쉬드와 바클리 부족과 함께 사나를 포위하자 3개월만에 도시에서 패주하였다. (1851년 2월) 하지만 같은해 알 만수르가 원정에 나간 틈에 알 무타와킬의 아들 알 하디 갈립이 반란을 일으켜 집권하였다. 그는 관대하게도 부친의 죽음에 대한 완전한 복수 대신 알 만수르의 재산을 빼앗는 것으로 그쳤다.[* 그후 알 만수르는 계속해서 사나 근교에 살았고 1870년 고지대의 혼란을 끝내주도록 오스만 조정을 초청하는 편지를 공동 집필하기도 함] 사나 북쪽의 라우다 회의에서 단독 이맘으로 선출되었음에도 알 하디의 치세 역시 불안의 연속이었다. 경쟁 이맘 압둘라의 도전에 그와 사나를 양분하는 지경에 이른 끝에 1852년 알 하디는 사나에서 축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