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나(예멘) (문단 편집) === (자이디) 카심 왕조의 수도 === [[파일:예멘 사나 1.jpg|width=700]] 사나 시가지 풍경 1644년 오스만 축출의 과업을 이룬 알 무아야드가 사망하자 짧은 내분 끝에 동생 '''알 무타와킬 이스마일'''이 계승하였다. 그의 치세는 자이디 이맘국 사상 최전성기로 평가된다. 1645년 자이디 군대는 아덴을 점령, 예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1654년엔 하드라마우트의 카티리 왕조 내분에 개입하여 그들을 복속시켰고, 1658년엔 현재의 오만 서부인 도파르 지역까지 속국으로 삼았다.[* 다만 이로써 오만의 술탄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그 강력한 해군에게 공격당하여 한동안 해상 무역이 침체되기도 하였다.] 일반 부족들이 세금을 내는 것과 달리 알 무타와킬은 어떤 부족들의 경우에는 역으로 조용히 지내는 대가로 보조금을 지급하는 관례를 만들어 안정을 유지하였다. 사나는 총독에게 맡기고 동남 방면 앗 수다에 마물던 알 무타와킬은 1676년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두 조카들이 다툰 후 알 마흐디 아흐마드가 집권하였다. 그는 1679년 사나 일대의 유대인 공동체를 추방하였고, 그들은 모카나 마즈와 등지로 향하였다가 이듬해가 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마즈와 추방)[* 아라비아에 두 종교가 있지 않는다는 무함마드의 언행에 따라 유대인 추방을 계획한 선대 이맘 알 무타와킬이 와병으로 시행하지 못하고 죽으며 후계자 알 마흐디에게 시행을 명령. 따라서 유대인들이 거금을 납부하겠다는 제안도 묵살된 채로 행한짐, 다만 소말리아의 제일라로 추방하려던 계힉은 유대인들을 동정한 아랍 부족들의 탄원으로 서북 해안에 추방하는 것으로 국한됨. 또한 이듬해 유대인 장인들의 부재로 농기구 등 기본재가 부족해진 것에 대한 민원으로 마즈와에 식량 보내고 복귀 허용. 다만 성내의 집 포기하게 하고 사나에서 2km 떨어진 카아 알 야후드에 살도록 조치됨] 1681년 알 마흐디가 요절하자 울라마의 중재를 거쳐 알 무타와킬의 아들 알 무아야드 무함마드 2세가 이맘위에 올랐다. 그의 치세에 하드라마우트 총독이 축출되는 등 이맘국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사나에 머물던 그는 이내 처소를 다우란으로 옮겼고, 이러한 풍조는 후대에도 종종 나타난다. 1686년 알 무아야드가 사망하자 7명의 왕공들이 이맘위를 놓고 3년간 내분을 벌였다. 그중 알 마흐디의 아들 알 마흐디 무함마드가 최종 승자로 떠올랐다. 다마르 동쪽 알 무와히브에 거처한 그는 부친에 의해 마즈와 추방을 겪었던 유대인들에게 사나 성내의 기존 집들을 돌려주었다. 한편 그의 치세에 카심 왕조의 쇠퇴는 더욱 분명해졌다. 1689년 하드라마우트 수복 시도는 실패했고 1708년 야파 부족에게 역으로 변경을 약탈당하였다. 1691년과 1709-12년엔 진압되긴 했지만 옛 수도 사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699년엔 사이디인 이브라힘 알 무하트와리가 마흐디를 자칭하며 반란을 겨우 진압되었다.] 1714년에는 반란군이 이맘이 있던 알 무와히브를 일시 포위하기도 하였다. 1716년 알 만수르 알 후세인의 반란 시에는 그 군대가 사나 근교를 약탈, 유대인 구역인 비르 알 아잡이 파괴되었다. 그후 알 마흐디는 아들 알 카심에게 반란 진압을 맡겼으나, 알 카심은 알 만수르에게 패한 후 그에게 복속하였다. 이에 알 마흐디는 양위하였는데, 알 카심이 선수를 쳐 스스로 이맘으로 선언하였다. (알 무타와킬 알 카심) 그러한 상황에서 연로한 알 마흐디는 알 무와히브에서 포위된 채로 사망하였고, 알 만수르 역시 샤라하에서 고립된 채로 1720년 사망하였다. 이로써 이맘국을 통합한 알 무타와킬은 1726년 한동안 경시된 사나의 아르합 부족과 대립을 빚었다. 알 무타와킬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그들과 맞서 힘겹게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듬해 아르합 부족은 하쉬드, 바킬리 등 다른 부족들과 재차 봉기하였고 이맘의 아들 알 후세인마저 가담하였다. 이에 학자 무함마드 빈 이스마일 알 아미르가 중재에 나서 휴전이 성립되었고, 몇달 후 알 무타와킬은 사망하였다. 이후 반군에 가담했던 알 후세인이 이맘으로 계승한다. (알 만수르 알 후세인 2세) 그는 친척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반란에 시달렸다. 알 만수르는 한때 앗 나시르에게 복속하기도 했으나 결국 1729년 후자는 사나로 찾아와 복속하였다. 그럼에도 혼란은 지속되었다. 1731년 아덴에는 라헤즈 술탄국이 세워졌고, 타이즈의 동생 아흐마드도 사실상 자립하였다. 그무렵 유럽은 [[자바]]와 [[카리브해]] 식민지에서 커피를 수입, 예멘의 커피 독점권이 붕괴되었다. 이로써 카심 왕조의 경제는 악화되었고[* 17세기 83만 리얄이던 1년 수입은 18세기 초엽 30만 리얄로 급감하였다. 알 마흐디의 노력으로 50만 디나르 선까지 회복되긴 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1748년 알 만수르는 사망하였다. 그를 계승한 '''알 마흐디 압바스'''는 경제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고 사나에 여러 공공 건물들과 사원을 세웠다. 1761년 덴마크 사절단을 이끈 독일인 탐험가 카슨 니부르가 사나의 궁정을 방문하고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정치적 상황에 대해 니부르는 다음과 같은 분권화된 상황을 기록하였다. 카우카반 - 사이드 영주 / 아부 아라쉬 - 샤리프 / 사다 - 사이드와 독립적인 셰이크들 / 나즈란 - 마크라미 / 카울란, 마리브 - 독립 셰이크 / 아덴 - 자체 군주] 같은해 알 마흐디는 사나의 14개 시나고그 중에서 12개를 파괴하였고 시내의 유대인들이 집을 7.5m 이상의 높이로 짓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사나의 주민들이 이단적으로 행동한다고 여긴 카디들은 1768년 반란을 선동했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다만 1772년 옥수수 부족에 분노한 사나 주민들이 실제로 봉기하자 알 마흐디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이를 진압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 및 프랑스 외인부대를 두었다. 1775년 알 마흐디가 사망하자 사나 총독이던 아들 알 만수르 알리가 계승하였다. 1781-85년 사이디인 이븐 이샤크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한편 아라비아 반도의 신흥 강국 1차 사우디 국가의 동맹인 아시르의 아부 눅타가 1803년부터 이맘국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더니 티하마를 정복하였다. 그럼에도 알 만수르는 반격을 계획만할 뿐 실행하지 못하였다. 왕권의 쇠퇴로 사나는 와지르 하산 알 울피의 수중에 있다가 1808년에야 이맘의 아들 아흐마드가 그를 체포하고 실권을 회수할 수 있었다. 연로한 이맘 대신 실세가 된 아흐마드는 사나를 습격하던 인근 부족들을 잠재우는데 성공하였고 1809년 부친이 사망하자 이맘이 되었다. (알 무타와킬 아흐마드) 그는 민심을 얻기 위해 세금 인하, 사면, 빈민 구제 등에 나섰다. 비슷한 시기 반기를 들었던 모카의 총독이 죽었고, 와하비 세력의 준동도 [[메흐메트 알리]]의 원정 후 수그러들었다. 후자가 진행 중이던 1816년 알 무타와킬은 사망하였고 아들 알 마흐디 압둘라가 계승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