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기(역사책) (문단 편집) == 후대의 평가와 번역본 == 물론 《사기》는 원저(原著) 그대로의 형식과 내용으로 현전하지는 않는다. 당장 표제가 사마천이 실제로 붙였던 '《태사공서》'가 아닌 '《사기》'라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열전> 맨 마지막 부분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정(正)·부(副) 두 본(本)으로 써서 정본(正本)은 명산에 보관하여 사라질 것에 대비하고, 부본은 경사(京師)[* 당시 [[수도(행정구역)|수도]]였던 [[시안(도시)|장안]]을 말한다.]에 보관하여[* 또는 외손자 양운(楊惲)에게 맡겼다고도 한다.] 후세의 군자를 기다리겠다." 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130권 가운데 <효경본기>, <효무본기>, <예서>, <악서>, <병서>,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 <삼왕세가>, <부근괴성열전>, <일자열전>, <귀책열전> 등 10권은 이미 전한 후기에 그 전권 또는 일부분이 빠져서 저소손(褚少孫)이 다른 자료들을 참조해서 보충했다. 예를 들어 저소손은 <귀책열전>을 시중에서 구하려고 했으나, 구하지 못해 다른 책들을 참조하여 보충했다고 한다. 사마천이 죽은 지 100년도 못 되어서 이런 상황이었다면 《사기》의 초기 역사는 상당한 수난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사기》 [[주석(언어)|주석]]서는 남조 [[유송]] 때 배인(裴駰)[* [[배송지#s-2]]의 아들.]이 쓴 《사기집해》(史記集解) 130권이다. 사마천의 시대로부터 약 600년이 경과한 이 시대에는 《사기》가 상당히 읽혔던 것 같은데, 탈간(脫簡)·착간(錯簡) 또는 서사(書寫)할 때의 오기(誤記) 등으로 판본이 각기 달라서 그것을 통일하는 주석서가 필요했을 것이다. [[수나라#s-4|수]]·[[당(통일왕조)|당]] 시대가 되니 종이에 서사된 《사기》가 몇 가지 나타났다. 당나라때는 사마정(司馬貞)이 《사기집해》(史記集解)를 근거로 《사기색은》(史記索隱) 30권을 짓고, 또 <삼황본기>(三皇本紀)를 만들어 이에 주석을 붙였으며, 장수절(張守節)이 다시 《사기정의》(史記正義) 130권을 지었다. 《사기집해》, 《사기색은》, 《사기정의》를 통틀어 사기 '''삼가주'''(三家注)라고 부른다. 2020년 한가람역사연구소 《신주 사기》에서 삼가주, 삼가주석을 포함한 완역본이 처음 나왔다. 다만 한가람연구소는 그 악명높기로 유명한 이덕일 소장의 연구소로, 환빠적 민족주의 논리에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하고, 실제로도 서문에 강단사학 운운하는 등 주의가 필요하다. 현대 역사가들은 《사기》를 단순한 사서가 아닌 태고부터 춘추전국시대를 지나, 한무제까지의 오만군상의 인간상과 사마천 본인의 개인적 고뇌가 담긴 '''인간학'''의 저서로 평가한다.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량치차오]]는 《사기》의 '''10대 명편'''을 선정했는데, <[[항우]]본기>, <[[신릉군|위공자]]열전>, <[[염파#s-1]][[인상여]]열전>, <[[노중련]]추양열전>, <[[한신|회음후]]열전>, <위기무안후열전>, <[[이광|이장군]]열전>, <[[흉노]]열전>, <화식열전>, <태사공자서>를 꼽았다. 또한 사마천의 《사기》로 중국에 역사학이란 것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했다. [[정조(조선)|조선 후기의 명군이었던 정조]] 역시 《사기》를 한문 문장의 전범(典範)으로 호평하고[* 정조는 당대에 유행하던 문장을 철저히 배격하고, 고문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문체반정'''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사기》에서 문장의 모범이 될 만한 열전 27편[* 여기에 《[[한서]]》 <열전> 여덟 편까지 더했다.]을 뽑아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을 편찬하기도 했다. 《[[삼국지]]》의 [[왕윤]]은 [[채옹]]을 죽일 때 《사기》를 '정부를 헐뜯고 비난하는 방서'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분명 보수적이고 정통주의적인 지식인들의 시점에서는 그랬겠지만, 오히려 최고 권력자에게도 서슬 퍼런 역사의 붓을 들이댄 사마천의 용기와 신뢰성을 높게 평가해 주는 장점이 되었다. 《사기》는 [[당나라]]때부터 관리 임용 시험 과목에 들어가면서 중시되어 [[송나라]]에서도 역사가와 문인들의 주된 관심대상이 되었다. '''당•송 8대가''' 중 한 명인 [[한유]](韓愈)는 사마천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유종원]](柳宗元)은 《사기》를 '''웅심아건'''(雄深雅健), 즉 >'문장에 힘이 있고, 함축성이 있어 품위가 빼어나다.' 고 평가하면서 문장 학습의 기본 틀로 삼았고, [[구양수]](歐陽脩)는 《사기》 애호가로서 《사기》를 즐겨 읽으면서 작문에 활용하고자 했다. 《사기》에 대한 평가는 [[원나라]]때 잠시 주춤했으나, [[청나라]]에서는 기윤(紀昀)과 조익(趙翼) 등이 재평가했고, [[량치차오]](梁啓超)는 사마천을 '역사계의 조물주'라고 떠받들었다. 장병린(章炳麟)도 《사기》와 《[[한서]]》를 같은 대열에 두고, 역사의 전범으로 여겼다. 특히 근대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 [[루쉰]](魯迅)은 《사기》를 일컬어 >"역사가의 빼어난 노래요, 운율 없는 이소다."(史家之絶唱, 無韻之離騷) - 《한문학사강요》(漢文學史綱要) - 라고 극찬했다. 《사기》는 군주에 대한 기록을 다룬 <본기>(本紀)보다 당대의 인물들에 대해 다룬 <열전>(列傳)이 좀 더 재미있고 읽기 쉽다는 평가를 받는다. <본기>는 천자의 일생과 업적을 다루고 있어서 연표에 따라 조금 딱딱하게 구성된 반면에[* 줄창 역사만 늘어놓는다.], <열전>은 다양한 인물군상을 다루고, 연도에 그리 얽매이는 편도 아니라 <본기>에 비해 덜 지루하며 더 생동감이 넘친다. 현장 답사 위주로 쓰여진 <열전>들은 문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흥미로운 일화나 사마천의 생각, 인물평 또한 <열전>에 가장 잘 드러나 가르침 역시 <열전>에서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