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기(역사책) (문단 편집) === 신뢰도 === 《사기》의 신뢰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상나라]](은나라) 관련 기술이다. 상나라는 사마천이 살던 시기인 [[전한]]과도 1,000년 가까운 간격이 있었던지라 《사기》에 서술된 상나라 기술의 신뢰도에 대한 의문은 계속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이전까지 상나라는 전설 속의 왕조이고, 거기 《사기》에 나오는 왕이나 사건들은 모두 지어낸 거짓말이나 구전으로 떠돌던 신화나 전설을 사마천이 집대성한 걸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현재는 존재 증거가 나오지 않은 하나라가 이런 전설 속의 왕조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상나라의 수도였던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에 나타난 상나라 왕들의 이름과 순서가 《사기》의 기술과 거의 일치하여 《사기》의 상나라 관련 기사에 대한 신뢰도를 증명해주었다. [[상나라/계보]] 문서 참조. 즉, 이런 각 부분부분에서의 실제 사실과의 일치가 종합적으로 모여 《사기》 전체의 신빙성/신뢰도를 높여 주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적는 이상, 그리고 정보 수집의 한계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므로, 《사기》에 기록되지 않거나 아래에서 말하는 식의 교차검증에서의 한계는 존재할 수밖에 없으나, 사마천의 시대를 감안하고 본다면 이런 수준의 정확성은 엄청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즉위한 일부 군주들의 재위 기간의 오류 문제와 기록이 누락된 군주[* [[위(전국시대)|위나라]](魏)의 군주인 [[위혜왕]]과 [[위양왕]]의 재위기간의 오류및 [[제(춘추전국시대)|제나라]](齊)의 군주 전도자(田悼子)와 [[제후섬]]의 누락으로 인해서 [[제(춘추전국시대)#s-4|전제(田齊)]] 초기에 꼬여버린 군주의 재위기간 등.]와 <공자 세가> 등 몇몇 부분에서는 일부 기사가 신빙성을 의심받기도 하나[* 사실 가장 대표적으로 언급될 만한 것이 <진 본기>의 한 부분이다. [[조고]]와 [[이사(전국시대)|이사]]가 서로 짜고 시황제의 유서를 빼돌렸는지 안 빼돌렸는지는 동시대 인물들도 쉽게 알 수는 없다.], 으레 그렇듯이 [[교차검증]]에서 걸리는 부분에 한정된다. 다만 추가적인 사료가 나오지 않는 이상, 어떻게 가능했겠냐는 의문과 가정으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사서를 부정하는 것은 심히 위험한 발상이기에 기본적으로는 사서를 따르는게 맞다. 그 외에 사마천의 기록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는 현재 학자마다 의견이 확연하게 갈린다. 관련 연구서를 종합해서 낸 유리 파인스(Yuri Pines)와 로타르 폰 팔켄하우젠(Lothar von Falkenhausen) 등이 말하듯, 현재 학계의 잠정적인 합의는 >'''《사기》의 왜곡과 오류에는 비판적으로 접근하되, 《사기》와 사마천의 커다란 공헌도 부정하지 않는다.''' 정도이다. 고고학과 출토문헌을 빼고, 전래 문헌만으로 중국 고대사를 재구성하기가 불가능함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이러한 고전 역사서에 대한 의심은 유독 서구에서 자주 나오기에 자연스레 반발심이 나오는 편이다. 다만 서구 사학계의 이런 성향이 아무 근거 없이 나온 것이 아님을 알아둘 필요도 있다. 근래에 이루어진 고고학의 성과와 출토 문헌의 활발한 활용은, 기존 전래 문헌의 신뢰성을 많은 부분 입증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전래 문헌의 오류들을 상당 부분 입증하기도 하였다. 이는 《사기》 역시 마찬가지라 많은 신뢰성이 출토를 통해 증거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오류들 역시 발견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