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자금 (문단 편집) == 역사 == 역사는 인류 문명만큼 오래 되었지만, '비자금'이라는 단어는 1987년 4월 범양상선(汎洋商船)의 불법적인 외화유출 사건에 대한 [[국세청]]의 발표에서 처음 등장했다. 과거에는 [[내탕금]]이라고 불리는 임금과 왕실의 비자금이 있었다. 아무리 왕이 나라의 주인인 [[전제군주제]] 국가라고 해도 국가의 [[예산]]인 나랏돈과 왕의 개인 재산은 별개였고 나랏돈을 왕이 멋대로 빼서 쓰는 건 제한이 있었다. 조선의 [[이성계]]는 왕이 될 때 이미 [[함경도]] 면적의 3분의 1 정도를 개인 재산으로[* [[함경도]]의 면적이 약 51,000km^^2^^이니 이의 1/3이면 약 17,000km^^2^^, 약 51억 4,000만평의 어마어마한 땅이 개인 재산이었다.]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이성계가 함경도 토호인데다 공신이 되어 보상을 두둑히 받아서 그렇다.] 이후 [[태종(조선)|태종]]이 아버지 태조의 개인 재산을 왕실의 소유로 선포하면서 대대로 조선 임금님들이 중요한 자금 출처로 사용하였다. 조선의 땅과 모든 사람은 원칙적으로 왕의 소유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서 내탕금이 왕의 든든한 돈줄이 되어주었다. 잔치를 벌이거나 개인적으로 신하에게 [[하사금]]을 내릴 때, 국가의 사업을 벌여야 하는데 신하들이 세금 쓰기를 반대할 때 등 왕이 돈은 쓰고 싶은데 공식적인 돈줄이 막히면 내탕금을 풀어서 각종 사업을 벌였다. 왕족들이 사치하는 돈도 내탕금에서 나왔다. [[정조(조선)|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을 지을 때 내탕금을 풀어서 근처의 땅값을 네 배 비싸게 쳐주고 이사 비용까지 대주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영조]] 역시 내탕금으로 구휼 사업을 벌였으며 경복궁 중건시 [[조대비]]는 내탕금 10만냥을 내놓기도 했다. 고종은 내탕금을 비밀리에 풀어서 [[헤이그 특사]]를 네덜란드까지 보낼 비용을 장만했다. [[내탕금]]은 [[내수사]]라는 내시 기관에서 관리하였다.[* 이 돈은 내관이 관리했는데 이들이 돈은 잘 밝혔기 때문이란다. 역사에서 환관들이 돈 밝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내시들이 믿을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의 내시란 환관을 말하는 것으로 거시기를 잘라내서 제대로 된 사람 취급을 못 받고 총애는 커녕 자리에 있는 것조차 왕의 덕에 가능한 만큼 왕 없으면 그만큼 왕에게 기대어야 하는 존재들로 한편으로 그렇기에 몰래 삥땅치다 걸리면 조지기에도 쉽다.] 내수사에서는 소출로 사채 비슷한 이자놀이를 하거나 땅을 소작하여 내탕금을 늘렸으며 늙어서 은퇴한 이후에는 퇴직금 명목으로 전별금을 받아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이는 내시들이 왕에게 절대 충성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내수사에서 관리하는 토지와 [[노비]], 사채 등은 왕의 재산이어서 관리들의 수탈도 없고 [[이자]] 역시(왕의 체면 때문이겠지만) 시중보다 저렴하였기에[* 조선시대 이자율은 보통은 1/2인데 내탕금은 1/3이었다.] 백성들은 땅을 내수사에 바치고 스스로 소작농으로 들어가거나 소작하려고 [[뇌물]]을 바치며 로비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왕비]]나 [[대비]] 등도 시집올 때 가지고 들어온 친정의 재산을 비자금으로 활용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