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구니 (문단 편집) == 기원 == [[슈도다나]] 왕이 죽은 후, [[석가모니]]의 [[이모]]이자 [[계모]]인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가 자신도 출가하게 해달라고 3번 호소했으나 거절당하자, 샤카족 여인들 수백 명과 함께 화장과 장식을 치우고 삭발하여 노란 [[가사(의복)|가사]]를 입고 [[맨발]]로 걸어와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호소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아난다]]도 안타깝게 생각하여 석가모니에게 여성 출가를 허가해달라고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아난다가 "이 길을 따르면 여성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석가모니는 그렇다고 답하였다. 아난다가 마하파자파티가 석가모니를 키웠던 공로를 들며 다시금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자, 석가모니는 오래 고민한 후 허락하겠다고 말했다. [[https://www.jungto.org/buddhist/budd8.html?sm=v&b_no=80770&page=16&p_no=74|#]] 이후, [[야쇼다라]] 부인을 비롯한 샤카족 부인들도 이를 따라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 불교]]의 [[종파]] 가운데 유일한 비구니 종단인 [[대한불교보문종]]은 마하파자파티를 종조(宗祖)로 받든다.] [[석가모니]]가 비구가 되길 원하는 남자들에게는 신분계급을 따지지 않고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비구 승단은 석가모니가 비구니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굉장히 크게 반발했다. 경전의 기록에 따르면 [[마하가섭]]이 어떤 비구니에게 심하게 모욕받자 "악녀야! 나는 네가 아니라 [[아난다]]를 책망한다."라고 답했다. 석가모니 열반 후 [[아라한]]이 된 승려들이 [[제1차 결집|결집]]할 적에 아난다가 참석하자, 마하가섭은 아난다의 잘못 몇 가지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였다. 마하가섭이 아난다의 잘못 몇 가지를 책했는지는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지목당한 아난다의 잘못 중에는 석가모니에게 비구니를 받아들이도록 권유했다는 것도 있었다. 사실 석가모니도 아난다를 게송까지 읊으며 책망하는 내용이 아함경에 있다. 석가모니와 마하가섭의 이런 반응을 보아, 석가모니 시절 비구 승단의 상당수는 비구니 승단이 생김을 굉장히 꺼렸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여승단은 마하가섭에게 적대적이었고, 아난다에게는 찍소리도 하지 않았다.] 또한 수계한 지 오래된 노비구니라 할지라도 갓 수계한 젊은 비구에게 예를 표하도록 하였다. 불교 여성차별의 대표적인 예로 인용되는 팔경법을 두고 논란이 존재한다. 팔경법을 [[석가모니]]가 만든 것이 아니라 [[부파불교]] 말기 시대 비구 중심의 승단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반박이 있다.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4988|법보신문 2007년 1월 31일 자]] 또한, 팔경법이 당시 [[인도]] 사회에서 비구니 승단을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이었다는 주장 또한 있다. 당시 인도는 지금보다도 더 심각하게 여성차별적이었으며, 비구니는 기존 [[인도인]]들에게 [[기생]]처럼 여겨져 [[성희롱]]·[[성추행]]·[[성폭행]] 피해가 자주 나왔기 때문이라 말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