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격진천뢰 (문단 편집) == 상세 == 쏘기 전에 자체 [[도화선]]에 불을 붙인 후 [[중완구]]에 넣어서 발사하여 500~600보(600m~1,080m) 정도 날아가 땅에 떨어진 뒤, 도화선이 끝까지 타들어가 뇌관에 불이 닿으면 터지는 원시적인 [[신관(동음이의어)|시한신관]]을 가지고 있다. 도화선이 다 타서 터지면 깨진 탄체(casing)와 안에 들어 있는 철편[* 즉, 탄체 자체가 깨져나가면서 파편화되어 터져나가는 것이 아니다. 탄체 내부에는 폭발에 쉽게 깨질 수 있도록 홈이 파여있으나, 파편화될 정도로 작게 부숴질 정도로 조밀하게 홈이 파인 것은 아니다. 화약이 터지면서 탄체가 쪼개지면서 내부에 있는 철편이 화약과 함께 사방으로 비산하는 방식이다.]이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한다. 용도는 위에서 아래로 굴려서 보내거나 적당한 곳에 내려놓고 심지에 불 붙이고 도망가거나 일반 박격포탄처럼 날려보내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폭발하는 1회용 소모성 무기였다. 복잡한 기계장치를 요하지 않으므로 충분한 재료와 설비만 있다면 현재도 재현할 수 있다. 2차 [[경주 전투|경주성 전투]]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이것 한 방으로 성을 탈환했다고 한다. [[대완구]]로 쏜 비격진천뢰가 성 안에 떨어지자 왜병들이 주위에 몰려들어 웬 쇳덩어리가 날아들어왔나 하고 우르르 몰려와 구경했는데, 심지어 굴리면서 갖고 놀았다던가 또는 장군이 발로 차고 놀다가 병사들 줬다는 설화도 있다. 그러나 잠시 후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걸레짝이 되어 나가떨어지자 기겁한 일본군들은 다음날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고 한다.[* 일본도 전국시대에 [[호로쿠비야]]같이 비슷한 물건을 많이 써먹었지만, 이쪽은 대포를 별로 안 쓴 당시 일본답게 비격진천뢰랑 다르게 '''사람 손으로''' 직접 던지는 식으로 운용했다. 하지만 이웃국가 조선은 각종 대포를 절찬리에 사용하던 나라였고, 그냥 빗나간 포탄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대포를 이용해서 훨씬 멀리서 날아온 호로쿠비야랑 비슷한 무기체계라는 걸 깨달은 순간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후퇴하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거기다 이미 한 달 가까이 이어진 조선군의 공격에 성의 사기가 많이 저하된 상태였다.] 이에 대한 당시 왜군 기록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 둘러서 구경하고 있는데 이것이 갑자기 폭발하자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같이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주변에 있던 자는 폭풍에 날아갔다.''' [[충격과 공포|기이하고 놀라서]] [[서생포왜성|서생포]]로 [[모랄빵|돌아왔다]]. >---- ><정한위략> 요 내용은 [[맹꽁이 서당]] 제3권에서도 나온다. 경주성 이외에도 1592년 7월 [[고경명]] 의병군이 [[금산 전투|금성을 공격할 때]], 1593년 우배선의 의병군이 향교의 일본군을 공격할 때, 동년에 [[이순신]] 함대가 [[웅포 해전]]에서 육상의 일본군을 공격할 때 쓰였다. [[진주대첩]]과 [[2차 진주성 전투]]와 1597년 [[남원 전투|남원성 전투]]에서도 사용하는 등, 널리 활용하였다. [[유성룡]]의 《진사록》에서 1592년 10월 기사를 보면 북쪽 지방에도 이미 비진천뢰가 각 지역 무기고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정만록》에서 중인이었던 저자가 1592년 6월 [[용인 전투]] 패전을 논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이장손이 수년 전에 비진천뢰를 만들어 쏘고는 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실제 비진천뢰 발명시기는 1592년 이전일 공산이 크다. 안동의 김해 의병대는 특이하게도 1593년 2월 24일 반암의 야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비진천뢰를 운용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향병일기]]》 참조). >목사([[김시민]])는 성 위에 비격진천뢰와 질려포(쇠조각이 든 탄환을 쏘던 화포), 그리고 큰 바윗돌을 모아 두고 적의 접근을 막았습니다.…적이 몰려오자 진천뢰나 질려포를 터뜨리고, 큰 돌멩이와 불에 달군 쇠붙이를 던지기도 하고, 끓는 물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왜적들은 계속 죽어나갔는데, 비격진천뢰에 넘어져 죽은 시체가 수도 없이 쌓였습니다. >---- >김성일, <학봉집> >비격진천뢰는 군기시의 화포장 이장손이 만든 무기다. 진천뢰를 [[대완구]](대포)에 넣어 쏘면 500~600보를 날아가 땅에 떨어져 한참 있으면 불이 그 안에서 일어나 터진다. '''왜적들은 이 무기를 가장 무서워했다.''' >---- >유성룡, <징비록> 폭발까지 걸리는 시간은 조절이 가능하다. [[도화선]]을 원하는 길이로 잘라 목곡에 감고, 대나무통 안에 넣은 뒤 탄체 안에 넣고 뚜껑을 닫아 도화선 끝부분만 밖으로 나오게 하면 안에 있는 도화선이 얼마나 긴지 알 도리가 없다. 더구나 적진에 떨어질 시점이면 탄체 바깥 부분의 도화선은 다 타서 없어졌을 것이기에 어디가 뚜껑인지도 구분하기 힘들다. 그러니 한 번 심지에 불을 붙이고 이게 내부로 타들어가면 이제 이걸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포열이 없다시피 한 중완구로만 발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확도가 낮았지만 위력은 엄청났던 것 같다. [[역사스페셜]]에서 비격진천뢰를 재현해봤는데 발사 후 폭음과 함께 엄청난 양의 파편을 뿌리며 폭발했으며, '''철편이 바위에 박힐 정도였다.''' 대인 제압용으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완벽한 [[유산탄]]이다. 보병들이 밀집 대형을 이루어 전투를 했고, 지금과는 달리 파편탄을 [[은엄폐|엄폐]]하여 방어한다는 개념이 없었던 당시 전투의 양상을 고려하면 상당한 위력이었을 것이다. 뭐 파편을 피하겠다고 보병들이 대형을 풀고 엄폐한다 쳐도 그 뒤에 기병들이 달려오면 앞이 깜깜하다. [[야전]]이나 [[공성전]]이 아닌 고지대 방어전이나 수성전에서는 불을 붙여 떨어트리거나 그냥 밑으로 굴리기만 해도 된다. 참호를 구축하고 싸우는 진지전은 근대에서야 나왔으므로 야지 전투에서는 기동성도 낮고 대형 유지하며 천천히 몰려다니던 보병을 몰살시킬 수 있다.[* 역사스페셜에서 만든 레플리카는 현대의 뛰어난 야금술 때문에 [[창작물의 반영 오류|재현 오류]]가 났는데 폭발력이 화약을 넣는 입구쪽으로 터졌다. 그러나 터진 비격진천뢰 유물을 보면 3조각에서 4조각 정도의 조각이 나있고 온전한 비격진천뢰 발굴이후 살펴본 결과 포탄 중간을 일부러 얇게 해서 그쪽으로 터지게 만들었다는게 밝혀졌다. 이는 현대의 [[수류탄/종류#s-1.2|세열수류탄]]의 외피 내부에 홈을 파서 파편이 생성되도록 하는 것과 유사한 설계이다.] [[융원필비]]에 기록된 별대완구용 비격진천뢰는 그 무게가 120근에 달한다고 나오는데 여기서 1근을 600 g으로 환산하면 포탄 무게만 72 kg 남짓인데 융원필비에 나오는 황자총통의 무게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근]]이 600 g이 아니라 더 가벼웠고, 또한 당시 [[도량형]]이 지역에 따라 크게 다른 경우도 있었기에 실제로는 더 가벼웠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일단 비격천뢰를 소장 중인 현충사 관리소에서는 둘레를 84 cm,[* [[농구공]]이 78 cm를 넘지 않는다.] 무게는 20근(약 12 kg)으로 기록했다. [[17세기]] 서양의 폭탄들도 전부 이런 [[흑색화약]]인데 그 화약과 조선의 화약은 별 차이가 없다. 만드는 과정이 서양에 비해 많이 어려웠던 것뿐이다.[* 조선에서는 흙 속에 들어있는 아주 적은 미량 원소와 배설물 등등에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초석]]을 긁어 모아 화약을 만들었던 반면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은 신대륙에서 초석 [[광산]]을 찾아내서 그냥 파내서 담으면 되는 정도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시대에 개발된 [[http://glob.egloos.com/v/2653071|슈랩널(shrapnel)]]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16세기에 만들어진 비격진천뢰 쪽이 18세기에 등장한 슈랩널보다 빨리 나왔다. 문제는 화약일 뿐이다. 비슷한 걸로는 제2차 세계 대전 말 일본군이 비격진천뢰와 구조상으로 하등 다를바 없는 [[수류탄/일본군#s-2.6|4식 도제 수류탄]]을 사용하기도 했다. 차이라면 재질과 위력이 다르다는 것이다. 비격진천뢰가 개발되기 전에도 [[진천뢰]]라는 폭탄이 있었고 한중일 3국에서 전부 사용되었으나 이는 손으로 던지는 충격식 [[수류탄]]에 가까웠고 화포로 발사하는데 필요한 지연 신관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2018년 11월 호남문화재연구원에서 전북 고창 무장현 옛 조선시대 관아와 읍성터를 발굴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과정에서 군사훈련장 터와 무기창고 건물터, 수혈(구덩이), 도로시설 등을 발굴했는데, 이중 수혈 안팎에서 비격진천뢰가 11점이나 발굴되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432430|#]] 기존에 전해진 비격진천뢰 실물이 6점뿐이었는데 한 방에 11점이 나와버린 것. 이전의 유물들이 속이 비어있는 것에 비해 파편역할을 하는 빙철과 화약, 발화장치들이 들어있고 비교적 온전한 모양의 뚜껑도 나와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