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블라디보스토크 (문단 편집) == 역사 == [[만주]]의 일부로, 본래 [[퉁구스]]계 유목민족들의 영역에 속해있었으며, [[한반도]]와 가깝기 때문에[* [[북한]] [[라선시]]에서 100km 정도밖에 떨어져있지 않다.] 한민족이 꽤 오랜기간 차지했었던 땅이기도 하다. 먼 과거에는 [[옥저|북옥저]], [[고구려]][* 2009년에 고구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었다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090721060106940|#]]]의 영역에 속해있었으나, 인구가 적은 변방으로 주요 도시는 아니였다. 고구려 이후에는 다시 [[말갈]]의 땅이 되었다가, [[발해]]가 연해주를 정복하며 블라디보스토크도 발해의 땅이 되었다. 그당시 블라디보스토크는 발해의 행정구역인 [[5경 15부 62주]] 중 [[솔빈부]]에 속해있었다. 그러나 솔빈부의 '솔빈'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였고, 현재의 [[우수리스크]]에 위치했던 도시를 가리키는 말이였다. 그 당시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는 동경과 정리부 근방의 시골동네에 불과했다. 이후 [[요나라]], [[발해부흥운동|후발해]], [[금나라]], [[원나라]]의 영토였다가 [[후금]]의 [[누르하치]]가 이 일대를 장악하면서 훗날 [[청나라]]에 복속되었고 [[1860년]]까진 [[청나라]] 영토였다. 그러나 청나라 당대에는 만주와 연해주에 봉금령을 내려 한족과 조선인들의 정착을 통제한데다가 연해주의 원주민인 통구스인과 북시베리아계 주민의 인구가 적었던 관계로 해삼산지로 유명했어도 큰 규모의 도시는 발달되지 않았고, 좀 발전된 어촌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러다 겨울에 [[부동항]] 확보를 위하여 일으킨 [[크림 전쟁]]에서 패배를 당했던 러시아가 할 수 없이 [[유럽]] 쪽 항구 확보를 포기하고 [[아시아]]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당시 [[아편전쟁#s-2|제2차 아편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청과 유럽 국가 사이에서 중재자를 자처하며 그 대가로 [[베이징 조약]]을 맺어서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극동에 [[부동항]]을 건설하기 원했던 [[러시아 제국]]은 [[1860년]]에 항구로 만들기 좋은 지형을 갖춘 이곳에 항구를 건설했고 이것이 현재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도시의 시작이다.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정반대편 먼 변방이지만 러시아 제국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곳으로, [[1891년]]에는 나중에 황제가 되는 [[니콜라이 2세]]가 황태자 신분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도]] 착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하기도 했다. 이곳이 태평양에 위치한 얼마 없는 러시아 제국의 [[부동항]]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중시되었다. '''이곳 역시 외항이 겨울에 얼기 때문에 완전한 부동항은 아니고''' [[쇄빙선]]이 없으면 항구 이용이 어렵지만, 적어도 내항은 얼지 않기에 절반이나마 부동항으로 쓸 수 있다.[* 러시아가 가진 태평양 방면의 또 하나의 부동항은 바로 [[캄차카 반도]]의 [[페트로파블롭스크]]이다. 그쪽은 바다가 깊고 해류의 영향이 있으므로 블라디보스토크보다 훨씬 고위도임에도 불구하고 (약북위 51도) 한겨울에도 바다가 잘 얼지 않지만 육상교통이 상당히 불편한 것이 흠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각 지명을 보면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굉장히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 언급한 '동 보스포루스 해협'이나 '금각만' 등의 명칭은 단순히 지형이 [[이스탄불]]과 유사해서 만이 아니다. 이스탄불, 즉 [[콘스탄티노플]]은 [[정교회]]의 상징적인 도시로 중요한 위상을 지녔고, 러시아로써는 이스탄불을 거쳐야 지중해로 진출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새로운 '콘스탄티노플'로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지명에 반영한 것이다. 청나라가 완전히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더 확실한 부동항인 [[황해]]의 [[뤼순]](러시아 이름은 포르트 아르투르)이 확보되자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요성이 조금 낮아졌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패배하고 뤼순을 일본에게 빼앗기면서 러시아의 유일한 극동의 부동항으로 다시 가치가 올라갔다.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지고 [[적백내전]]이 진행되면서 [[모스크바]]가 [[볼셰비키]]에 장악당하고 백군 황제파는 극동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밀려 났다. 이때 백군 세력은 블라디보스토크를 [[http://rus-moscow.mofat.go.kr/webmodule/htsboard/template/read/hbdlegationread.jsp?typeID=15&boardid=2287&seqno=559557&c=TITLE&t=&pagenum=1&tableName=TYPE_LEGATION&pc=undefined&dc=&wc=&lu=&vu=&iu=&du=|1922년 몇 개월간]][* 링크가 열리지 않고 있는데 본래 링크 내에 있던 내용은 외교부의 블라디보스토크 개황이었고 1922년 국민회의가 블라디보스토크를 네 번째 로마로 호칭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http://cafe.daum.net/khanpeople/6Yw6/52?q=%EB%B8%94%EB%9D%BC%EB%94%94%EB%B3%B4%EC%8A%A4%ED%86%A0%ED%81%AC%20%EC%A0%9C4%EC%9D%98%20%EB%A1%9C%EB%A7%88|출처]]). ] '''[[제3의 로마|제4의 로마]]'''로 선포하기도 했다.[* 중세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제2의 로마라고 불렀으며 동로마 제국 멸망 후 남은 [[동방정교회]]권 국가 중 가장 크고 강한 [[러시아 제국]]이 로마를 계승을 자처하며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선포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의 잔존세력인 백군이 적군 세력에 맞서 러시아 제국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근거지를 제4의 로마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그해 가을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창설당시 [[적군]]의 일부를 참여시키기도 하였고 극동 공화국이 적군의 완충국이라 적군으로 보기도 한다.]이 도시로 진주하면서 제4의 로마는 막을 내렸다. [[1860년]]에 최초로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에 조선인 13가구가 정착함으로써 연해주 한인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됐다. 이후 1869년에는 한반도 북녘 대기근으로 조선인들의 이주가 급증하며 인구가 1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이 그렇듯 전체 인구의 5분의 4는 [[중국인]]이나 [[한국인]]인 도시였다. 하지만 지역 내 [[콜레라]]가 발생하자 러시아 정부에서는 조선인의 위생상태를 원인으로 지목하였고, 그 결과 [[1910년대]] 초반까지 블라디보스토크 내로 이주, 신한촌이라는 한인 거주지가 건설되었다. 신한촌의 [[1914년]] 당시의 인구는 무려 6만 3천 명으로, 비슷한 시기 일제강점기 [[경성부]]의 인구가 27만여 명이었으니 엄청난 숫자다. 이러한 영향으로 이 곳은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으로 가장 먼저 임시정부격인 단체인 [[대한 국민 의회]]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와 연해주 총독의 압박 등으로 한인 사회가 무너져 내렸고, [[자유시 참변]] 등으로 대표되는 독립군들에게 가해진 여러가지 탄압으로 인해 연해주의 독립운동은 [[1930년]]대 이후에는 거의 씨가 말랐다. 아울러 [[1937년]]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명령으로 연해주에 거주중이던 모든 한인들을 열차에 태워 [[카자흐스탄]] 혹은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강제이주시켰다. 강제이주 사유는 한인들이 일본에 협조할 수도 있으며, 일본 첩자들과 외모가 비슷하여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연해주에 거주하던 중국인 등 다른 소수민족들도 강제이주를 당했다. 동아시아지역이지만 현재의 블라디보스토크는 [[백인]]이 '''90%'''가 넘어, 미국, 캐나다, 호주 평균보다 백인 비중이 더 높다.[* 미국 기준 백인이 60% 정도, 캐나다가 70% 정도이며 호주가 85% 정도이다.] 바로 옆의 중국 훈춘만 해도 백인과 전혀 관련 없는 한족과 조선족이 96%를 차지하며 북한 라선시는 거의 100% 한민족이다. 이것은 국경선을 기준으로 문화, 민족 구성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1991년]]에 [[소련 해체|소련이 해체]]하고 구 소련의 연방국들이 독립했다. 이 독립국들은 본국인 [[러시아]]나 [[벨라루스]]같이 특수한 사례[* [[벨라루스 SSR]]은 1950년대 초반까지 다른 구성국들과 비교해서도 더욱 억압적인 통치와 탄압을 받아 어느정도 러시아화 되었으며 [[나치 독일]]에 의해 [[벨라루스 초토화|최대 벨라루스 국민의 20%에 달하는 인구가 죽어버렸고]] 이후에 러시아인들이 이주 및 정착해 러시아와 긴밀해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를 제외하면 소련의 지배 역사를 지우기 위해 자국민 우대 정책이나 자국어 부흥 정책 등을 펼치고 타 민족들을 배척했는데, 배척의 대상에는 한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인들이 기껏 일구어놓은 삶의 터전이 한순간에 악몽으로 변해버렸고, 이를 견디다 못한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재 이주하는 중이다. 왜 한국이 아니라 러시아냐면, 이들의 모국어는 러시아어가 되어 러시아가 더 살기 편하기도 하고 [[독립국가연합]] 내에서 이주는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에서도 인구 감소 문제 때문에 재이주하는 한인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