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브루나이 (문단 편집) == 역사 == ||<-7><:> '''{{{#cf1126 브루나이의 역사 관련 틀}}}'''|| ||<-7><:>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동남아시아의 역사)] [include(틀:말레이시아의 역사)] [include(틀:양서)] [include(틀:북사)]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 브루나이 지역에 실존 여부가 명확한 국가가 기록상 등장하는 것은 기원후 10세기 무렵으로, 중국의 《태평환우기》(太平環宇記, 10세기 송나라 지리서)에서 이 지역을 '발니'(渤泥)라고 언급했다. 그 이전에는 약 6세기에 '위자야푸라'(Vijayapura)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하지만 실체가 불확실하다.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보르네오 북부 사라왁강 삼각주는 비교적 비옥한 곳으로, 중국과 인도를 잇는 항로의 중간 지점에서 약 6세기부터 13세기까지 중계 무역으로 번성했다고 한다. 발니, 즉 브루나이는 14세기 [[마자파힛 제국]]에 속했다가 독립해 교역국으로 점차 발전했다. 14세기 후반 명나라 사신이 지역을 방문했고, 이에 따라 브루나이가 잠시 명나라와 직접 교류하기도 했다. 15세기 초 [[명나라]]의 환관 [[정화(명나라)|정화]]의 항해 시 왕이 2차례 당시 [[명나라]]의 수도 [[난징]]을 입조했다. 15세기 중반에 왕이 믈라카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브루나이에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다. 1511년 포르투갈이 믈라카를 점령하면서 바닷길이 막힌 이슬람 상인들이 대거 브루나이로 이주하여 인도네시아 군도의 섬들과 말레이 반도, 마카오 등을 잇는 중계 무역 지대가 됐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술탄 볼키아(Bolkiah, 재위 1485–1524)의 시대가 세력권 기준으로 브루나이의 전성기였다. 이때 [[북보르네오]] 해안 전역을 지배하던 브루나이는 공격적 팽창 정책으로 15세기 말 오늘날 [[필리핀]] 지역인 [[팔라완섬]]과 민도로섬을 점령하고, 보르네오 동부의 [[인도네시아/역사#s-7.5.3|브라우]]와 [[인도네시아/역사#s-7.5.2|쿠타이]] 일대와 [[루손 섬|루손섬]]의 [[마닐라]] 및 톤도 왕국 지역까지 영향권에 편입했다. 볼키아의 치세 후반에는 일시적으로 [[술루 제도]]와 보르네오 서부 일부 해안 지역까지 브루나이의 영향력이 미쳤으나, 보르네오 동부, 서부, 술루 제도는 볼키아 사후 빠르게 브루나이의 영향권에서 이탈하였다. 이때 브루나이의 세력이 보르네오 남부 해안 지대까지 미쳤다는 주장도 있는데, 물론 브루나이가 남부와 교역은 했겠지만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전반 보르네오 남부는 토착 세력과 자바 세력이 이미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던 상황이므로 정치적 영향력은 있었더라도 약했거나 일시적이었을 것이다.[* 다만, 15세기 말이나 16세기 초가 아니라 15세기 초 무렵이라면 브루나이가 보르네오 남부에 영향력을 미쳤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역시 정치적 영향력은 일시적이었을 것이고, 이를 확실히 입증하는 것도 어렵거나 불가능할 것이다.] 16세기 전반, 보르네오 남부의 신흥 세력 [[반자르 술탄국]]이 등장하여 보르네오 남부 해안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반자르 술탄국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에 오늘날 [[인도네시아]] 남칼리만탄주를 중심으로 보르네오 남부, 동부, 남서부 해안 전역을 영향권에 편입하는 전성기를 맞았다. [[자바 섬|자바]]의 [[마타람 술탄국]]도 17세기 전반 술탄 아궁의 시대에 전성기를 맞아 보르네오 남서부를 영향권에 편입하고 남보르네오에서 반자르 술탄국과 세력 경쟁을 벌였고, 17세기에 술라웨시 남부의 마카사르와 부기스 세력도 보르네오 동부에 개입하여 반자르 술탄국과 알력을 빚었다. [[대항해시대]]로 인해 16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세력이 [[술라웨시 섬|술라웨시]] 북부와 [[말루쿠 제도]]를 거점으로 보르네오에 진출하기도 했다.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첫 방문에서는 마젤란이 [[필리핀]] 제도에서 사망했으나, 1578년에 스페인군이 마닐라를 거쳐 보르네오 일부 지역을 한때 지배하였다. 이때 루손섬에서는 16세기 후반 [[스페인]] 세력이 진입하여 토착 세력들을 복속시켰다. 17세기 중반 들어 술탄이 포르투갈과 동맹해 스페인군을 쫓아냈지만 포르투갈 등 외세가 내정에 간섭했다. 17세기 초 시점에 브루나이의 영향력은 보르네오 북부를 제외하고 완전히 소멸하기에 이르렀다. 17세기 이래로 브루나이의 영향권에 남은 것은 보르네오 북부뿐이었으며 인구도 급속히 줄어 1750년경 기준 약 40,000명에서 1830년 기준 약 10,000명이 되었다. 17세기 중반 [[술루 술탄국]]의 세력 확장으로 보르네오 북동부(오늘날의 [[말레이시아]] [[사바]]주) 일부 지역을 브루나이가 술루 술탄국에 양도하는 일도 있었으며, 술루는 이 지역을 19세기 중반까지 지배하였다. 이후 브루나이는 내부 분열 등으로 국력이 쇠퇴해 갔고, 각 지방의 족장들이 술탄조차 무시하고 반란을 일삼았다. 특히 1839년 사라왁에서 이반족이 반란을 거세게 일으키면서 사바 주까지 파급되기도 했다. 이에 영국의 모험가 제임스 브룩(James Brooke)이 이반족을 신무기로 진압해 1841년 술탄으로부터 [[사라왁 왕국]]의 '라자'(Rajah)로 봉해졌다. 이후 그는 [[다약인]]을 사라왁 군대로 끌어들여 복무시키고 홍콩과 싱가포르의 영국 해군도 이용해 30년간 사라왁 지역의 영토를 점차 잠식해 갔다. 오늘날의 사바주에 해당하는 지역은 서구 열강의 관점에서도 식민지로서 영유하기에 매력이 큰 곳은 아니어서 1860년대부터 미국인 사업가와 오스트리아 사업가 등이 브루나이 술탄에게서 지역의 권리를 받아 경영하려고 했지만 15년 가까이 실패만 거듭하다가[* 이때 제임스 브룩과 비슷하게 미국인 사업가가 브루나이 술탄에게서 '라자' 칭호를 받기도 했지만, 이 미국인 '백인 라자'는 결국 식민지 건설에 실패하고 떠나야 했다.], 결국 영국인 사업가 앨프리드 덴트(Alfred Dent, 1844–1927)와 영국 외교관 러더퍼드 올콕(Rutherford Alcock, 1809–1897)이 [[북보르네오#s-3|북보르네오 칙허 회사]](North Borneo Chartered Company)를 세우고 1880년대 초부터 본격적인 사바의 경영을 시작하였다. 북보르네오 칙허 회사 역시 사바주에서 브루나이의 세력권을 잠식하였다. 사라왁과 사바 지역은 1888년부터 공식적으로 대영제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한편 브루나이 술탄은 사라왁과 사바 양쪽에서 영토를 빼앗기는 와중에, 차라리 영토를 보전하려면 영국 산하로 들어가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하여 영국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1888년 9월 17일부터 브루나이 역시 대영제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그러나 브루나이의 기대도 무색하게 사라왁 왕국은 사라왁과 브루나이 양국이 영국의 보호령이 된 이후인 1890년에도 브루나이의 판다루안(Pandaruan) 지역을 합병해 버렸는데, 영국은 이에 개입하지 않았다. 1906년부터는 공식적으로 영국 통감(resident)이 브루나이에 주재하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별 볼 일 없던 브루나이는 1929년 석유가 발견되면서 세계로부터 주목을 받았고, 이로써 영국이 전 브루나이 지역을 적극 탐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때 일본 제국이 지배했으나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 항복 후 철수하면서 영국이 돌아와 보호령으로 다시 선포했고, 네팔에서 구르카족 용병을 고용해 반발에 대비했다. 그러나 점차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 러시가 시작되면서 영국은 점점 식민제국주의자로 낙인찍혀 이미지가 악화됐고, 결국 1959년에는 자치를 허용시켰다. 이후 헌법 및 의회를 마련할 준비를 취해 1962년에 역사상 유일한 총선거가 치러져 공화파 [[사회주의]] 정당 브루나이 인민당(PRB)[* 원어명인 Parti Rakyat Brunei의 약자다. 말레이시아 인민당의 브루나이 지부로 출발한 정당이었다.]이 전의석을[* 선거로 부쳐진 전 의석. 1959년 브루나이의 입헌군주제 개헌은 제한된 것이었으며 의회의 상당수 의석은 브루나이 국왕에 의해 임명되었었다.] 싹쓸이하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것은 왕실의 분노를 샀고 PRB의 주요 의제 중 하나였던 [[북보르네오 연방]]에 대치되는 브루나이의 말레이시아 가입을 PRB의 참여를 배제하여 날치기로 통과시키자 PRB의 반란으로 이어져 영국의 개입으로 인해 PRB는 진압되고 해산당했다. 이로 인해 선거 결과가 무효화되어 그토록 마련한 헌법도 전부 쓰레기장으로 직행하고 말았다. 오히려 왕권이 더욱 강화돼 현재의 전제 군주정 체제가 된 것이다. 같은 시기 말레이시아 연방 성립의 움직임이 보이는 가운데 왕실은 연방 가입 자체를 거부하고 영국 보호령을 고집했는데, 이는 석유 수익 독점 및 왕권 수호를 위해서였다. 그 사이 영국이 국제 여론을 의식하며 독립을 수차례 독촉하자 1984년에 정식 독립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 [[제임스 브룩]]에게 삥뜯긴 사라왁은 여전히 말레이시아령이다. 독립 이후에는 현재까지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술탄]]의 통치가 [[21세기]]인 지금도 가능한 비결은 막대한 [[석유]]자원이다. [[영국]]의 식민통치에서는 가장 늦게 독립했다. 말레이시아 연방으로 편입하려다가 취소해 일부러 독립을 늦춰가며 영국의 품안에서 점진적으로 주권을 찾아 나갔다. [[싱가포르]]와는 반대의 경우인데 싱가포르는 말레이 연방에서 축출당했다. 그래서 최근까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늦게까지 [[식민지]]였던 나라였으나 [[2002년]] [[동티모르]]가 독립하면서 동남아 최후기 독립국이라는 타이틀은 벗었다. [[1984년]] 독립 이후 30대 술탄인 [[하사날 볼키아|하사날 볼키아 무이자딘 와다울라]](Hassanal Bolkiah Mu'izzadin Waddaulah)는 전제정을 펴면서 [[독재]]정치를 하고 있으며, 정당은 왕실을 지지하는 국민연합당 하나만 허용되며 언론이나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는 제한되고 있으며, 아무리 브루나이 투자기관 책임자 제프리 볼키야가 잘못된 투자로 국가 예산을 날린다 해도 국민들은 비판할 자유조차 못 쥐고 있다. 그래서 [[언론자유지수]]도 2021년 기준으로 144위를 기록하며 [[콜롬비아]]와 맞먹는다. 때문에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엄청난 오일 머니를 이용해 적극적인 복지, 취업 정책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세금이 없으며, 오히려 1달에 1번씩 전 국민에게 일정 액수의 금액이 지급된다. 수도에 있는 모스크의 크고 아름다운 야경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또 남아있는 영토가 [[말레이시아]] [[사라왁]]주의 림방을 두고 분리되어 있어서 말레이시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이동할 수 있게 템부롱 대교를 건설하였다. 2019년 4월 3일부터 브루나이는 샤리아법을 통과시키면서 비난을 받고 있고 거기에다 동성애자까지 처벌하고 투석형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비난을 받았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1&oid=003&aid=0009152049|#]] 그리고 샤리아법을 통과시키자 브루나이 정부가 소유하는 호텔사용을 보이콧하거나 하는 등 항의가 이어지고 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1&oid=001&aid=0010744957|#]] 하지만 주변국들은 이에 대한 공식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3&oid=001&aid=0010746130|#]] JP모건도 브루나이 왕실이 소유한 호텔을 직원이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003&aid=0009202355|#]] 국제사회의 비난이 커지자 브루나이 측은 샤리아법 시행을 유예하겠다고 밝혔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1&oid=032&aid=000293859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