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브레멘 (문단 편집) == 역사 == 브레멘 일대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로 추정한다. [[빙하기]]가 한창이던 기원전 1만 2,000년 무렵 만들어진 원시인들의 유적지가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추진한 [[게르만족]] 정복 시도로 잠시나마 브레멘 일대가 로마의 영역에 들어왔던 적이 있지만,[* [[엘베 강]]까지 약 20년 동안 로마가 지배했던 적이 있다. 물론 완벽한 지배가 아니라 주요 거점과 교통로에만 로마의 힘이 미치는 정도.] [[토이토부르크 전투]]의 참패 이후 로마군이 [[라인강]]으로 국경을 물렀기에 로마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편 2세기에 [[프톨레마이오스]]가 작성한 유럽 지도에는 지금의 브레멘 위치에 게르만족 영역지가 있는데, 일부에서는 이를 근거로 이 때부터 브레멘이 존재해왔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라 대다수 학자들의 반응은 "쓰읍...글쎄..." 정도. 3~4세기 무렵에는 작센족이 이곳으로 이주했으며, [[중세]] 이후에는 [[프랑크 왕국]]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프랑크 왕국이 비기독교화 게르만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8세기 후반 이 지역 최초로 [[주교]]가 파견되어 주교좌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것이 현재 브레멘의 직접적인 시초이다.[* 고대 말에도 이미 많은 로마 안밖의 게르만족이 기독교화되었으나, 로마하고는 거리가 떨어져 있던 부족들은 여전히 [[게르만 신화]]를 믿고 있었고, 이는 나중에 [[카롤루스 대제]]가 정복전쟁과 강압적 동화정책을 정당화하는 근거로도 활용되었다.] 오늘날 브레멘이 사용하는 열쇠 형상 시문장도 지역 주교좌 및 주교도시 문장을 그대로 이어 온 것이다. 그러다가 10세기 무렵부터는 베저 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노르웨이]], [[네덜란드]], [[잉글랜드]]와 무역을 하면서 부를 쌓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주교에게서 화폐주조권을 인정받았으며, 결국엔 바르바로사(Barbarossa) [[프리드리히 1세]]에게도 [[제국자유도시]](Freie und Reichsstädte)로 지정받으면서 여러 특권들을 누렸다. 이러한 특권에는 브레멘 주교를 포함한 [[영주(중세)|영주]]들로부터 브레멘 시내의 재산권을 보호받는 것이나 브레멘으로 도망쳐 온 [[농노]]의 신변상 자유를 인정하는 것 등이 있었는데, 중세 독일의 [[속담]]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다(Stadtluft macht frei)'가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제국자유도시가 된 이후로도 브레멘 주교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했지만, 13세기 [[한자동맹]] 가입은 브레멘 도시공동체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막대한 부를 자랑하는 브레멘은 완전한 [[자치]]를 누릴 수 있었다.[* [[도시]], [[자유도시]], [[코뮌]] 문서 등에서도 언급되지만, 원래 유럽전통에서 도시와 주교는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도시 단위로 새 주교구가 설립되거나 반대로 주교구가 설립되면서 새 도시를 만들었고, 초기에는 주교가 도시 영주로서 세속 영주로부터 도시민을 보호하고는 하였다. 하지만 상업과 도시가 발전하면서 이러한 구조는 오히려 도시민에게 장애가 되었고, 차츰 주교로부터 해방되기를 꾀하였다. 이는 금융, 유통, 생산 등 교회나 세속귀족은 담당하지 못하는 경제 영역에서의 기능들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막대한 자금을 융자받는 영주들이 도시공동체의 눈치를 살피는 경우도 있었고, 브레멘시와 브레멘 주교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이렇게 잘 나가던 브레멘의 기세를 꺾어버린 것은 17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이었다. [[종교개혁]]과 [[30년 전쟁]] 시기 브레멘은 상인답게 전쟁을 피하고자 [[중립]]을 선포하고는 막대한 부를 이용해 중립을 지키기 위한 용병까지 고용하면서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려고 했다.[* 다만 브레멘 자체는 종교개혁에 호응해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세력이 다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독일 [[개혁교회]]의 중요한 기원이 된 곳이었다. 그래서 중립이었는데도 [[함부르크]]나 북유럽 세력 등 다수가 [[루터교]]에 가담한 주변 지역 사이에서는 눈엣가시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베저 강 하구라는 지정학적 요소와 무역으로 쌓아올린 막대한 부는 개신교와 가톨릭 진영 모두에게 매혹적인 요소였고, [[덴마크]], [[프로이센]], [[스웨덴]], [[합스부르크]] 등등 다양한 세력이 브레멘을 놓고 충돌하였다. 특히 스웨덴과는 [[공성전]]까지 벌였으나, 브레멘으로서는 다행히 점령만은 피했다. 하지만 스웨덴이 포위를 푸는 조건으로 내세운, 브레멘을 둘러싸는 각종 요새의 해체와 [[제국의회(신성 로마 제국)|제국의회]](Reichstag)로의 대표 파견 금지를 허용하면서 최전성기의 위상을 더는 누리지 못하게 됐다.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스웨덴에 속하게 되었으나, [[대북방전쟁]]으로 스웨덴이 패권을 상실하면서 1720년에 [[하노버 왕국|하노버 선제후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후로도 무난하게 지내던 브레멘을 뒤흔든 것은 [[나폴레옹 전쟁]]이었다. 1811년 나폴레옹이 브레멘을 점령하면서 프랑스의 속국이 되었다가 나폴레옹의 몰락과 더불어 [[빈 회의]]에서 다시금 자유도시로의 권리를 인정받고 [[독일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1817년 독일 최초의 [[증기선]]이 이곳에서 발명되면서 [[산업혁명]]과 시너지 효과를 내어 베저 강의 수운을 이용한 [[운송업]]이 폭발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하였고, 1827년에는 해운업을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하노버 왕국]]으로부터 [[베저 강]]에서 [[북해]]로 빠지는 항구 일대를 사들였다. 이것이 바로 [[브레머하펜]](Bremerhaven). 그 이후로도 쭈욱 이어져 현대 독일 국내에서 유일하게 월경지가 있는 주가 되었다.[* [[바덴뷔르템베르크]]주도 스위스에 월경지가 있지만, 이 경우에는 아예 국경이므로 논외.] 이후 미국과의 항로를 개척하여 신세계와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경제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이때 유명 해운회사인 North German Lloyd(NDL)가 1857년에 설립되었다. NDL은 이후 함부르크의 해운사인 Hamburg-American Line(HAPAG)과 합병하여 지금의 [[하파크로이트]](Hapag-Lloyd)가 되었다. 그리고 브레멘은 독일뿐만 아니라 중앙 유럽 내륙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이 많이 거쳐가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브레머하펜에는 이민박물관이 있어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목록도 확인할 수 있다. 독일계 미국인들은 여기에서 자신들의 조상의 발자취를 체험하기도 한다. 상업과 공업의 발달로 도시는 상인과 노동자로 북적였고, 그래서 [[독일 사회민주당]]과 진보자유민주주의 정당들은 브레멘에서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마지막 제국의회 선거에서도 사민당이 53.4%, 그외 진보자유민주주의정당들이 총합 41.4%의 득표를 하였다. 심지어 1933년 이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독일 정부]]를 완전히 장악한 다음에 치루어진 조작투표에서조차 나치당의 브레멘 내 득표율은 32.7%밖에 되지 못했다. 이에 나치 정권은 브레멘 주의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자기네 인물들로 주정부를 채워넣었다. 당연히 나치의 집권 이후 미국과의 무역은 중단되었지만, [[나치 독일]]은 이곳을 해군도시로 삼고 잠수함도 건조하였다. 당연히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브레멘을 군수도시로 지정하고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나치 정권에 가장 반대한 곳인데도 결국 나치 탓에 온갖 피해는 다 입은 셈이다. 이후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면서 미영불소로 [[연합군 점령하 독일|4분할 된 독일]]의 영역 가운데, 점령지가 내륙에 국한된 [[미국]]이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브레멘을 [[미군]] 점령지로 삼았다. 물론 이는 그전까지 미국과 활발히 무역하던 도시라는 점도 작용했다. 그래서 미국 점령지 중에서 브레멘은 [[월경지]]가 되었다. [[서독]]이 성립된 이후 브레멘은 다시 기존 지위를 인정받아 [[니더작센]]주의 일부가 아닌 16개 주 중 하나가 되었다. 이는 초대 주총리가 된 빌헬름 카이젠(사민당)이 니더작센으로 강제통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브레멘에서 초당적인 합의를 이끌어내 나치가 집권하기 전 민주주의 체제를 복원하였기에 가능하였다. 브레멘의 시청사는 다행히 폭격을 피해서 지금도 독일에서 원본 그대로 남은 가장 오래된 시청사로 남았다. 브레멘은 독일의 전후 경제 성장과 더불어 해운과 조선업, 제조업으로 경제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인해 시민 다수가 교외지역인 니더작센주로 이주하면서 브레멘의 시재정이 점점 줄어들었고, [[1970년대]] [[오일쇼크]]가 터지고 독일의 중공업 쇠퇴와 맞물려 조선소들이 문을 닫으면서 위기가 닥쳤다. 이에 시는 재정 및 산업구조 개선에 공을 들였고, 현재 브레멘 경제는 해운업과 항공부품제조산업, 자동차부품제조산업, IT산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다만, 맥주양조장인 [[벡스]](Beck's)를 제외하면 독일을 대표할만한 [[중견기업]]도 없고 전반적인 서비스업 발전도 느리며 인구변화도 정체상황이라서 여전히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있다. [[2020년]] 기준으로 브레멘 인구의 1/3이 이민배경이 있는 사람일 정도로 독일에서 이민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