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붕당 (문단 편집) ==== [[사림파|사림]]의 성장과 집권 ==== 붕당의 시작 자체는 [[성종(조선)|조선 성종]] 이후,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다. [[사림파|사림]]의 시작은 조선 초,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유학자(신진사대부 온건파)를 중심으로 향촌 사회에서 학문에 임했던 집단에서 시작된다. 고려의 삼은([[이색(고려)|목은]], [[정몽주|포은]], [[길재|야은]]) 중 한 명이라 불리는 야은 [[길재]]의 학풍을 이어 받았으며 이게 지극히 당연한 것은 [[이색(고려)|목은]]은 [[정몽주|포은]]과 [[정도전]] 등 [[공민왕]]시기 정계에 진출한 신진사대부들의 스승이였고, [[정몽주|포은]]은 [[공양왕]]시기 [[이성계]], [[정도전]]과 대립하면서 조선 건국을 막다가 [[이방원]]에게 살해당한 인물이였다. 사람에 따라서 고려의 삼은에 넣기도 하는 [[이숭인|도은]]은 조선 건국 직후 유배갔다가 과격한 곤장형 집행으로 살해되었으니, [[길재|야은]] 말고는 후계를 전할 인물이 없었다.[* 다만 두문동에서 72명의 사람들이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가 사망했다는 것은 그냥 야사이다.] [[성종(조선)|성종]] 시기 성종이 훈구파(당시 여당)를 견제할 목적으로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을 등용하면서 사림파가 형성된다.[* 이를 통해 붕당 자체는 자생화 되었다기 보다 임금의 주류 신료 견제를 위해 파생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이들은 성종의 승하 이후 [[연산군]]과 [[중종(조선)|중종]] 시절에 여러 차례의 옥사에 시달리며 탄압받았다.[* 중종이 즉위하자 잠깐 [[조광조]]가 그 기틀을 잡아 중흥을 이루게 되지만 조광조가 너무 나서댄 탓에 숙청된다.] 연산군과 중종 시절에 여러 차례의 옥사를 겪으면서 정치 혼란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여파로 관리, 군사, 조세, 학문이 본격적으로 문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특히 15세기에 발달한 관학이 엄청난 속도로 쇠퇴했다. 사간원의 간언은 어디까지나 간언이었고, 법적효력이 전무하여 임금이 파업을 할 경우 죽음을 무릎쓰고 반정을 하는 것이 아니면 대책이 전무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중앙 관직을 내려놓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관원이 증가했고 그로 인해 지방의 학문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학문의 소양을 닦으며 성리학에 대한 이해와 연구를 하게되었고 그 결과로 성리학에 대한 여러 가지의 이론과 학설이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1545년에 백운동 서원이 건립되고 1549년에 사액 서원이 되면서 지역 유지와 사림들이 [[서원]]을 곳곳에 세우기 시작했고 성리학의 대한 이론과 학설을 계승할 제자들을 양성했다. 이미 [[명종(조선)|명종]] 시기에는 사림파는 규모나 학문에서는 거대해지게 되었고 때마침 옥사도 잠잠해 지면서 사림의 조정 진출이 잦아지며, [[선조(조선)|선조]] 시기가 되면 사림파는 핵심 계층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