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불교 (문단 편집) === 오온(五蘊)과 행위(카르마) === [[우파니샤드]]에서 전래된 오래된 가르침[* 불교의 제사 배격, 아트만, 업보, 윤회와 해탈 등은 원래 우파니샤드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아트만은 '나(아트만)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인간 내면의 근원 정신으로써, 여기에 육체를 더하면 불교의 오온에 해당한다.]이 상좌부 불교에 흡수되어 전승. 근본 불교에서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자아)을 부정하므로써 나온 개념이 안-아트만[* an-: '~없다.'를 나타내는 접두사. 따라서 anatman(안-아트만)은 '무아(無我)'를 말한다.]. 즉, '무아'이다. 무아를 강조한 근본 불교에는 '아트만'의 개념이 잠시 사라졌다가, 근본 불교의 뜻이 희석되자 상좌부 불교에서 다시 '오온'과 '카르마'라는 개념으로 부활하였다. 여기서 아트만이란, '절대 변하지 않는 자신만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영혼(아트만)의 특징은 '자신이 쌓아온 경험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아트만)은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몸'을 빌려서 윤회를 하며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행위(카르마)'에 따라 정해지게 된다. [[윤회]], [[업보]], [[신]]의 유무, [[지옥]]과 [[천당]]의 존재는 아트만(영혼)의 개념이 있어야 성립하는 것이며, 아트만은 본디 무아(안-아트만[* an-: '~없다.'를 나타내는 접두사. 따라서 anatman(안-아트만)은 '무아(無我)'를 말한다. 즉, 영원불변의 영혼(아트만)은 없다는 것.])의 개념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상좌부 불교 시대에 이르러 두 개념은 공존하여 모순을 만든다. 이렇기 때문에 상좌부 불교에서는 아트만이 있어야 개념이 성립하는 윤회를 받아들이면서도, '안-아트만'을 깨달아서 해탈하면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모순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 '무아'의 깨달음을 통해 아트만(자아)을 부정하면 윤회나 업보를 믿을 필요가 없고, 아트만을 긍정하면 '무아(안-아트만)'의 깨달음은 헛된 것이 된다. 아트만을 부정하여 나온 개념이 근본 불교의 안-아트만(무아)이기 때문에 두 개념은 본디 공존할 수 없는 것인데, 상좌부 불교 시대에 이르러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의 개념'과 '불교의 안-아트만의 개념'은 서로 공존하게 되어 모순을 만들게 된다.][* 정작 붓다가 살아있을 적의 초기 불교에선 대놓고 정확히 이런 오해와 모순이 발생하는 걸 경계하고 있다. 초기 불교의 '무아' 개념은 '''영원불변한 자아(= 아트만)는 객관 세계에선 없다.''' 딱 거기서 멈추며 자아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여기에 더해 붓다는 [[경험론]]적이던 초기 불교답게 '''우리가 경험 자체를 할 수가 없는, 그래서 확인이 불가능한''' 오온 외의 자아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아(無記) 의외로 이쪽에선 모순이 발생하진 않는다. 업 개념 역시도 결정론의 [[우파니샤드]]&[[자이나교]], [[단멸론]]의 물질주의 학파들과는 다르게 '''업은 원인"들" 가운데 하나''' 라는 입장을 취해 환경, 상황, 결과, 동기등을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데 사람들은 대부분 동일성 = 연속성이라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데다 헷갈리는 단어 상의 문제까지 맞물려 [[안습|이미 당대부터 신학자들까지 오해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학사 - 데이비드 J.칼루파하나의 '불교철학 역사분석' 참고.] || atman || [ruby(an,ruby=없다.)]-[ruby(atman,ruby=아트만)] || || 영혼, 나, 아트만 || 무아 (안아트만) || 상좌부 불교에서의 '나[* 우파니샤드에선 아트만, 상좌부에서는 오온에 해당한다.]'는 어떻게 정의되고 응용되는지 살펴보면, 상좌부 불교에서 '나'라는 것은 나의 몸(색), 나의 느낌(수), 나의 기억(상), 내가 했던 것들(행), 나의 생각(식)들로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경험과 기억과 행위와 사고 들이 "'''쌓여서'''(蘊)", '나'라는 인격과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색수상행식을 "다섯가지 '''쌓임''', 즉 오온(五'''蘊''')"이라 하는데, 오온 = 아트만(영혼: 수,상,행,식) + 육체(색) 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상좌부 불교에서도, 이런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아트만)'는 가상이며 이런 오온이 실체가 없는 것을 알아 '무아'를 깨달으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 [[상좌부 불교]]의 가르침에 해당하는 고집멸도의 [[사성제]]와 [[팔정도]]에는 도리어 '나'라는 아트만의 개념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업보]]'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는데서 모순이 생긴다. 우선 카르마에 따른 업보를 살펴보자. 업보란, 오온으로 이루어진 '내'가 지금 '올바른 행동(카르마)'들을 행한다면, 이 ''''올바른 행동'들이 쌓여 미래의 '나'''(자아)''''를 만들게 되고, 이렇게 '올바른 행동'들로 만들어진 '나'''(자아)''''라는 인격은, 올바른'''(좋은) '''생각을 하여 괴로움을 쉽게 이겨낸다는 것'''. 반대로 지금 '내'가 괴로운 것은 과거의 내가 올바르지 못한 행동들을 했기 때문이다.[* '업보'(카르마)의 개념이다. 따라서 업보나 인과응보 등은 아트만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며 '올바른 아트만'을 만드는 일은 상좌부 불교에서 권장하는 바 이지만, 이는 '무아(안아트만)'해라는 근본 불교의 가르침과는 모순되게 된다.] '현재의 (어떤) 행위가 쌓여서, 이것이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업보(카르마)의 개념은 [[사성제]]와 [[팔정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성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가인데, 고집멸도에서 '집'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집'은 집착의 '집'이 아니라, 모을 집(集)이다. [[팔리어]]로는 'samudaya': sam- 쌓이다. udaya 일어나다. 합쳐서 해석하면, '쌓여서 일어나다.' 즉, 괴로움의 원인은 (행위karma가) 쌓여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 이는 당연히 오온과 업보의 개념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상좌부 불교]]에서 오온과 [[업보]]의 문제(괴로움)를 풀어주는 방법인 팔정도는 어떠한가. 팔정도의 정언, 정견 등에 보이는 正은 팔리어로 접두사 sam-, samma- 에 해당되며 sam-의 뜻은 '쌓는다'이다. 따라서 팔정도의 정언, 정견 등은 올바른 말을 쌓고, 올바른 것을 보는 것을 쌓아라는 것. 이는 마찬가지로 '(어떤) 행위가 쌓인다'는 오온과 업보(카르마)의 개념이다. 이 둘을 종합하면, 행위(경험의 축적)를 통해 '내(아트만-괴로움)'가 만들어지고, 이러한 '나'는 '올바른 행위'를 쌓음으로써(팔정도), 해결된다는 것. 즉, 올바른 말과 생각, 올바른 생활과 노력 등 팔정도에서 말하는 대상은 '나'일 수 밖에 없고, '나'는 아트만을 의미하므로, 아트만이 없어야 되는 '무아'개념과 모순을 이룬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올바름을 쌓아라'는 개념은 근본불교에는 없는 개념이다. 어떤 사람은 법구경의 내용이나 부처님 오도경을 들고나와 근본 불교에 '[[윤회]]'의 개념이 있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틀린 얘기이다. 법구경은 '올바름을 쌓아야 된다'는 개념과 승단의 개념을 서술하고 있는 상좌부 불교 영향하에 있는 저술이기 때문이다. (시기상으로도 숫타니파타 4,5장보다 훨씬 늦게 지어졌다.) 이는 근본 불교와 상좌부 불교의 차이점을 잘 모르는 셈. 숫타니파타 4,5장은 근본 불교, 숫타니파타 1,2,3장은 상좌부 불교에 해당되며, 이후 저술된 [[아함경]]과 법구경 등도 상좌부 불교의 영향하에 있다. 숫타니파타 4,5장에는 '[[윤회]]' 개념이 없다. 정리하자면, 근본 불교는 언어자체가 현실을 1대1로 반영하지 못하며 이로 인해 괴로움(탐욕, 싸움, 어리석음)을 유발한다고 보았고 사회와 가정을 떠나 무소의 뿔처럼 홀로 살면서 깨달음을 추구하였다. 반면, 상좌부 불교는 이러한 가르침을 전수 받은 장로들이 모여서 승단을 만들고, 사회를 형성하면서 생기는 문제들을, '올바른 것들을 쌓아' 계와 율을 지켜야지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또한 '행위(카르마)'를 중시하는 상좌부 불교에서는, 근본 불교의 명색(名色)보다는 무명(無明: 올바른 행위를 알지 못하는 것. 무명도 [[우파니샤드]]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과 행(行: 행동, 행위)을 중요시 여기게 되고, 이에 따라 근본 불교의 원시연기(숫타니파타 4장 '투쟁과 논쟁의 경'에서 나오는 원시적 형태의 연기. 명색이 근본원인으로 나오며, 여기서 무명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는 상좌부 불교의 [[12연기]]로 변하게 된다. 이는 사실상 과거의 우파니샤드 시대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모순되는 두 개념, 근본 불교의 안아트만(무아)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나)은 상좌부 불교 하에서 공존하게 된다.] 이 모순된 관점('무아를 말하면서 올바른 나를 또한 강조')은 상좌부 불교 이후의 [[대승 불교]]나 [[밀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팔정도]]에서의 '올바름'이란 '선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여기서 '올바름'은 해탈(무아)을 이루려는 방향을 의미하기 때문에, 무아와 모순되지 않는다" 또는 "그것은 오해이고 사실 단견[* 윤회하지 않음]과 상견[* 영혼과 같은 실체가 항상함]을 부정하며 연기의 원리로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불교에서는 윤회를 말하고 있고 그 윤회가 '전생'과 '내생'을 인정하는 한, 이러한 윤회를 하기 위해서는 '''그 '윤회의 대상'인 아트만(영혼)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아트만이 없다는 무아의 정의와 논리학적으로 모순되는 지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즉, 윤회 개념은 아트만의 개념 없이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아트만을 인정해야 하나, '아트만이 없다'는 무아의 가르침과 서로 논리학적으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도 이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에도, 과거의 행위들이 쌓여 현재 '나'의 상태를 만든다는 카르마(업보)의 개념은, 사람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올바른 행위'를 쌓아 '올바른 나'를 쉬지 않고 만들어야하며, '나쁜 행위'를 쌓으면 '나쁜 나'가 만들어져 괴로움에 빠지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는 '인과응보'의 개념으로 나름의 가치를 지니며 지금까지 불교에 이어져 오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