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불경 (문단 편집) ==== 역사 및 위상 ==== 과거에는 팔리어 경전이 성립시기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추측했기에 세계 불교학계, 특히 남방의 상좌부 불교를 중시하는 서구 중심으로 매우 권위가 높았다. 지금도 국내 남방불교 지지자들은 이 점을 자주 강조한다. 하지만 [[아소카]] 왕이 남긴 비문과 석주에 인용된 불경[* [[숫타니파타]]와 담마파다(법구경)의 내용 일부를 인용했다.] 내용과 팔리어를 문헌학에 기초해 비교하여 연구한 결과, 팔리어는 [[석가모니]]가 활동했던 인도 북동부 지역 방언보다는 중서부 방언의 요소가 강했다.[* [[인도]]도 [[중국]]과 비슷하게 넓은 국토에 인종이 다양하므로, 방언이 한반도처럼 그냥 지역 사투리 수준이 아니다.] 다시 말해, 석가모니가 사용한 언어는 팔리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네팔]]과 [[인도]] 중남부 지역에 발견된 패엽경과 [[금석문]] 일부를 제외한 현존 팔리어 경전도 실제로는 기원후 5세기 스리랑카에서 마하위하라[* 일명 대사파. 상좌부 불교의 각 부파 중에서도 보수 경향이 가장 강하고 교조주의적인 교파로, 자신들을 표현할 때 자기네는 나무고 다른 부파는 나무에 돋은 가시로 비유한다.] 부파와 마하위하라 소속 학승 붓다고사가 자파의 교설과 전승을 중심으로 기틀을 잡았고[* 당시 마하위하라 부파는 스리랑카 불교계의 패권을 놓고 다른 불교 계파와 경쟁 중이었다. 니까야를 정리한 것도 자신들의 경쟁력 강화가 목적이었다.] 17세기에 [[포르투갈]]과의 전쟁 및 강제개종, 사찰 약탈 과정에서 스리랑카 불경이 산실되자, [[태국]]과 [[미얀마]]에 잔존하던 필사본을 옮겨 적어 정리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포르투갈 이후 스리랑카 해안 지대를 식민지배했던 네덜란드는 불교를 탄압하지 않는 편이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개신교 국가 네덜란드는 근세 내내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가톨릭 국가 포르투갈과 식민지를 두고 싸우는 입장이라, 가톨릭 신도들만 집중적으로 탄압했다. 참고로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을 골탕먹일 목적으로 인도의 [[네스토리우스파]] 출신 기독교도들이 포르투갈의 가톨릭 강요로 갈등하는 것을 보고 이들을 시리아의 기독교도들과 만남을 주선했던 바 있었는데, 같은 맥락에서 포르투갈인들의 침략으로 스리랑카 내륙 산간 지대에 고립되어 있던 [[싱할라인]] 불교 신도들을 태국과 연결시켜 주었다.] 국제 불교학계에서는 그 위상이 많이 하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