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분서갱유 (문단 편집) == 원인 == 이 사건은 대개 [[봉건제]]적인 질서를 옹호하던 유가가 군현제를 철저히 시행하려 하던 법가 통치에 저항한 시도로 보인다. 봉건제는 책봉을 받아 특정 지역을 대대로 다스리는 대리인을 필요로 하여 지방의 자치적인 질서를 용인하는 반면, 군현제는 전국 통치를 황제가 임명하는 지방관을 통해 철저히 황제와 직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유가(제자백가)|유가]](儒家)는 기본적으로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과거의 질서 체계를 옹호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s-6]](禮)로써 존중받으며 통치자에게 충고를 보태는 봉건제적 신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법가]](法家)는 신료로 임명받는 인물은 철저히 법에 의거한 실무 수행만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법을 거스르는 신료의 자율성과 세습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혈연 관계 혹은 혈연 관계로 의제되는 인물을 각 지방의 제후로 임명하여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자는 종법제도적인 질서가 왕과 제후 사이의 혈연의 거리가 멀어진 서주 시대 후반부터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고 하극상이 벌어진 것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이를 대체할 새로운 통치 구조가 바로 [[군현제]]로, 세습되지 않고 철저히 군주에 의해 임명되는 행정 관료인 [[태수]]와 [[현령]]을 [[제후]] 대신 배치하여 고인 물이 썩는 현상을 방지하고, 예를 통한 막연한 통제 대신 법을 통한 철저한 통제로 이들을 제어하자는 이론이었다. [[진(영성)|진(秦)나라]]는 4세기 [[상앙]]의 변법 이래 [[법가]](法家)의 [[군현제]] 질서에 완전히 익숙해진 국가였으나, 10여년 만에 급속한 통일을 이루면서 영토가 몇 배나 커졌고, 당연히 각지의 [[기득권]] 세력이 표면상으로는 사라졌으나 언제 들고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전국을 36군으로 편성하여 군현제의 틀을 씌워는 놓았으나, 이전까지의 중국은 애초에 각지의 문화 자체가 철저히 달랐고 정치적인 의견도 완전히 달랐다.[* 애초에 [[춘추시대]]부터 [[진(영성)|진나라]]의 통일까지 텀이 530년이나 되니 모든게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 지역은 완전한 [[중원]]도 아니었다.] 이로 인한 분열을 막기 위해 진시황은 '''[[문자]] 통일, 도량형의 통일, 도로 규격의 통일'''[* 당시 군사력의 중심이던 [[전투 마차]]의 빠른 동원을 가능하게 하여, 군사와 행정에 큰 도움이 된다.] 등을 추진하였다. 흔히 '''통일 중국'''의 첫 다리를 놓았다고 평가되는 이러한 업적들과 같은 맥락에서 사상적 통일을 꾀하는 과정에서 분서갱유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통일 중국의 기초를 닦은 진시황'''과 '''사상을 탄압한 [[폭군]] 진시황'''은 전혀 둘로 나누어볼 인물이 아니다. 역사 저술을 불태운 것 또한 진의 정통성을 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본래 역사서는 함부로 쓸 수 없는 책으로 철저히 관의 주도에 의해 쓰이는 책이었으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으로 각국이 저술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국 각지의 역사서가 존재하는 상황은 '''세계 유일의 황제'''를 추구하던 진의 입장에서는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결과 분서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선진#s-2]](先秦) 시대의 역사서가 춘추, 국어, 죽서기년 정도만 남은 것은 후세의 사가들에겐 탄식 거리지만.[* [[사마천]]의《[[사기(역사책)|사기]]》조차 이보다 100여년 뒤에 나온 책이며 그나마도 몇몇 왕들은 뭘 했는지 기록이 없는 등 사마천이 그렇게 고생하며 썼는데도 이정도다.][* 덧붙여서 초중기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부실해서 연구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이다. 이유인 즉슨, 고조선은 옆에 위치한 연나라와 적대하고 바다로 접한 제나라와 활발히 교역을 했고, 이 때문에 제나라와 연나라 역사서에 고조선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서술되어있으리라고 추측되는데, 제나라와 연나라의 역사책이 분서로 죄다 날라가면서 고조선에 대한 기록들도 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사기(역사책)|사기]], [[정사 삼국지]], [[한서]] 등에 고조선에 대한 기록들이 일부 실려있기는 하지만 그리 상세하게 실려있지 않기 때문에 초중기의 고조선이 어떤 나라였고, 어떻게 세를 확장해나갔는지에 대해서 전적으로 신화와 고고학에 의존해야되는 실정이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