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분서갱유 (문단 편집) == 개요 == >"옛것을 배워서 새것을 비방하는 자들은 '''모두 멸족 시키십시오.'''" >----- >[[사기(역사책)|사기]]의 기록 중(中).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책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파묻음''''이라는 뜻으로, 기원전 213년과 기원전 212년에 일어난 별개의 두 사건을 하나로 합쳐서 일컫는 것이다. 실용서를 제외한 사상서를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한 탄압책으로 중국에서는 '''분갱(焚坑)'''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시황제|진시황제]]는 이전까지는 중국 대륙의 혼란을 종식시킨 유능한 군주였다가 '''이 사건 하나로 인해 [[폭군]]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후에 [[항우]]는 [[초한전쟁]] 중 주가 등의 [[유학자]]들에게 욕을 먹자 "시황제 그놈이 왜 그렇게 너희들을 탄압했는지 알겠다."며 이기기만 하면 이것을 [[벤치마킹]] 하려는 기미를 보이기도 했다. 결국 그럴 기회는 없었지만. 항우의 성격과 [[신안대학살]]을 봤을 때, 만약 천하를 얻은 자가 [[고제(전한)|유방]]이 아니라 항우였다면 진짜 실행 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항우는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불태우고 [[약탈]]하는 과정에서 그곳에 있던 책들도 불태웠으므로 갱유는 몰라도 분서는 이미 실행했다. 사상적 탄압이 아닌 순수한 분서로서는 진시황보다 오히려 항우가 한 게 훨씬 더 심각했다는 말도 있을 정도.][* 사실 진나라에서는 책을 불태운 건 사실이지만 전부 다 태운 건 또 아니고 각종 학문에 대한 서적을 한 권씩은 남겨두어 함양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를 항우가 와서 죄다 태워버렸던 것. 그렇다보니 사서삼경 중에서도 몇몇은 소실되어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고 결국 한나라 때 유학은 훈고학이 주류가 되었다.][* 또, 이 때 [[소하]]는 진나라 수도에 보관되어 있던 전 중원의 기록을 빼내어 이것이야말로 [[중원]]에서 제일가는 보물이라고 말하면서 유방에게 바쳤다. 그리고 한나라는 이 기록에 적힌 대로 세금과 공물을 거두고, 군사를 징병하여 그 물량으로 초나라를 물리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