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이탈주민 (문단 편집) === 다른 분단국가의 난민 === [[독일 재통일]] 이전에는 '레푸블리크플루흐트(Republikflucht, 탈공화국[* 공화국은 동독에서의 자국을 일컫는 말이다.])이라는 동독→서독행을 택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동독의 주변국들이 사실상 우회 탈동을 묵인하여 탈동이 너무나도 쉬웠다는 점에서 기인하였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 그 규모가 탈북자에 비해 무려 75배였다고 한다. 당시 서기장이었던 [[에리히 호네커]] 본인이 서독 출신에 이산가족 출신이라서[* 고향인 [[노인키르헨]]이 [[서독]]령으로 있었는데, 당시 이곳에 [[에리히 호네커]]의 여동생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호네커 본인부터가 [[요시프 브로즈 티토]]나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형제와 함께 공산권 지도자 중에서는 친서방 진영에서도 상식인 대접받던 몇 안되는 인물이어서, [[김일성]] 일가 마냥 살기위해 달아나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김정은]]은 어머니 [[고용희]]가 남한 지역의 [[재일교포]] 출신인데도 [[김정일]]보다 더 강도 높게 잡아들이는 판국이다.], 대놓고 탈동하다가 발각된 사람을 제외하면 탈동 자체를 그냥 묵인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탈동 자체를 전면 허용하는 건 당연히 아니라서, 가족 중에 탈동자가 있으면 직장이나 당국의 눈칫밥 먹으며 사는 신세로 살아야 했다는 점에선 [[북한]]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에 관하여 차이가 있다면, 탈북자가 나온 집안 전체를 [[적대계층]]으로 전락시켜서 사람취급도 안 해주는 북한과는 달리, [[동독]]은 그저 탈동자 가족의 커리어를 꼬이게 만들었을 뿐, 그 친척이나 자녀들은 일절 건드리지 않았다는 점이 있다. 영화 [[굿바이 레닌]]을 보면, 주인공의 어머니는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당원이라서, 남편(주인공의 아버지)이 [[서독]]으로 탈출한 뒤로 당국의 눈치를 보며 살았음을 고백하지만, 그랬든 말든 주인공 본인은 전기기사로 일하면서 별 문제없이 사는 걸로 나온다.]. 그리고, 어쨌든 탈동이 어디까지나 [[탈북]]하는 것에 비해 쉽다는 거지, 무슨 제 집 드나들 듯할 수 있는건 아니라서, 탈동하다가 발각되어 현장에서 사살된 사람들의 수가 수백에 달했다. 때문에 탈동 과정에서 겪은 독일인들의 슬픔을 [[스페인]]의 [[가수]] [[라 오레하 데 반 고흐]]가 [[https://www.youtube.com/watch?v=nVCJ0wyw1ZA|Dia Cero]]라는 노래로 표현했다. [[북한]]에서 보통 사람들이 공식적인 방법으로 [[중국]]으로 가기 힘든데 반해, [[동독]]에서는 그냥 휴가를 간다고 하면 별 어려움 없이 [[체코슬로바키아]]로 갈 수 있었다. 여기서 [[중립국]] [[오스트리아]]로 가는데, 오스트리아는 중립국이기에 1957년 체코슬로바키아와 국경을 개방했다. 때문에 오스트리아로 우르르르 몰려갔다가 언어가 같은 오스트리아에서 신원을 확인하고 서독으로 넘어갔다. 물론 [[베를린 장벽]]이 생기기 전에는 우회하지 않고 직접 넘어갔다. 분단 시절에 서독도 현재 탈북자들처럼 동독 이탈자에게 정착금 지원도 있었고, 탈북자들이 겪는 갈등도 서독 내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오는 계층은 대부분 은퇴자들이었다고 하는데, 은퇴자를 서독으로 보내면 복지 부담을 덜 수 있다는 이유로 동독 정부가 은퇴자의 '탈동'을 강경하게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동독 정부는 청년에 비해 은퇴자나 노인의 서독 방문 허가는 잘 내줬다. [[대만]]에서는 중국 대륙에서 넘어온 사람들에게 한동안 반공의사라고 대접하기도 했지만 지금 중국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괄목한 성장을 했기 때문에 굳이 중국 대륙인들이 탈북하듯이 대만으로 올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은 그냥 대만으로 여행오는 중국 대륙인들이 많고 이들은 물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간다. 또한 대만 정부는 귀순자에 대한 정착 지원이나 혜택 등을 일절 베풀지 않고 있다. 다만 현재는 분단국가로서 서로의 국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중국 대륙인이 대만에 호적을 개설하면 대만 국적을 얻을 수 있는데 대만의 정치 상황에 따라 쉽게 개설될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다. [[1992년]] 양안 컨센서스 이후 중국 → 대만으로 이민 온 사람이 [[2015년]] 기준으로는 거의 50만 명에 달한다.[* 대만 인구의 1%를 넘으며 [[대만 원주민]]보다도 숫자가 많다.(...)] 일반적인 중국 → 대만 이민은 경제적 목적(취업) 등을 위해 대만에 왔다가 눌러살게 된 경우(의외로 상당하다), 대만인과 결혼하는 케이스(이것도 많다) 등이 있다. 대만에서는 이들을 신세대 [[외성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탈북처럼 중국 → 대만으로 망명가는 케이스는 아직 가끔씩 볼 수 있는데, 중국의 [[민주화]] 인사, [[파룬궁]] 등 반체제 [[난민]][* 중국 민주화 인사나 파룬궁은 [[대한민국]]에도 꽤 많은 수가 [[난민법]]에 따른 난민으로 인정되어 들어와 살고 있다.]들이 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이전까지는 같은 이유로 홍콩으로 망명가는 중국인들도 좀 있었다. [[베트남]]이 분단된 시절, [[북베트남]]에서 자유를 찾아 탈북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제네바 협정]]으로 분단이 확정된 1954년, 북베트남이 한참 토지개혁과 종교탄압을 할때 지주나 종교인들이 [[남베트남]]으로 피난왔었다. [[키프로스]]도 2008년 이전까지는 [[북키프로스]]에서 남키프로스로 탈북한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쪽은 이념 차이가 아니라 [[그리스인|그리스계 주민]]과 [[터키인|터키계 주민]] 간의 민족주의적 갈등이 분단의 원인[* 사실 그래서 이 당시에 [[그리스군]]이 [[키프로스]] 지배권을 놓고 [[터키군]]과 무력충돌을 벌일 때,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린든 B. 존슨]]이 [[그리스]] 대사를 [[백악관]]으로 불러내어 압력을 넣어서 [[튀르키예]] 측과 정전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당시 그리스와 터키 모두 친서방 국가라서 이들끼리의 대립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므로, 취업 문제같은 경제적 원인이 아니고서야 구태여 탈북을 하려는 경우는 없었다. 애초에 북키프로스가 경제적으로 낙후된 원인도 순전히 이 '나라'를 [[튀르키예]]의 [[괴뢰국]]으로 보았던 국제사회에서 국가 승인을 거부하는 여론이 컸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의 수교가 어려워서 그런 것일 뿐이다. 그래서 서서히 북키프로스에 자치권을 주고 통일하자는 여론이 날로 강해지는 오늘날에는 다시금 제한적으로나마 양자간의 교류가 늘어서, 옛날처럼 탈북자가 늘지는 않게 되었다.[* 사실 이는 [[키프로스|남키프로스]]가 [[그리스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인해 똑같이 경제위기를 겪게 된 바람에, 구태여 [[북키프로스]] 주민들이 남키프로스로 갈 이유가 없어진 탓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