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경제/역사 (문단 편집) == [[1950년대]] == 해방 직후 북한이 가졌던 우월한 중공업적 기반은 [[한국전쟁]] 당시에 박살이 나고 만다. [[커티스 르메이|특히,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큰 화학 콤비나트였던 흥남 지역은 미군의 온갖 포화로 거의 초토화되었으며, 황해도 송림 지역에 있던 겸이포 제철소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뉴라이트(대한민국)|뉴라이트]] 같이 과거 극좌파 운동권이었다가 극우파로 전향한 인사들은 북한의 1950~60년대 경제 성장이 일본이 남겨놓은 공업 설비 때문이라면서 [[식민지 근대화론|일제 식민지 지배가 한국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며]] 찬양하지만, 북한이 미군의 전략 폭격으로 공업 지역이 모조리 파괴되었고 그로 인해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도움을 받아서 경제 기반을 다시 마련했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개중에는 북한이 폭격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일제 공업 핵심 장비들은 모두 미리 빼돌려 놓았을 거라고 말하는 뉴라이트 인사도 있으나,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 애초에 그 일본이 남겨놓은 설비가 더 있던 북한이 지금은 남한은 커녕 아프리카 최빈국들과 비교당하는 수준으로 못 산다는 점에서 뉴라이트들 자신들의 주장서 모순이 생긴다. 때문에 맨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당시 소련, 중국[* 특히 1958년까지 북한에 주둔했던 [[중국 인민지원군]]이 많은 노동력을 제공했다.], 동독, 체코 등등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 시기 북한의 많은 인재들이 소련이나 동유럽에 유학을 하면서 선진 기술과 문물을 배워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폭적인 지원으로 초토화된 북한의 산업 기반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재건했으며, 특히 흥남질소비료공장의 경우에는 이전 시기보다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재건되었다. 당시 북한의 산업화 정책은 초기 스탈린의 산업화 정책과 유사한 선중화학공업 노선이었기 때문에 북한은 심지어 '''국방비를 줄이면서까지''' 돈을 들여[* 이상우, '북한 40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성과 변천', 을유문화사, 1990, p358. 북한의 산업화를 위한 국방비 절감은 일견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 비하여 군사적 우위를 가진다고 국민 다수가 판단하는(그리고 실제로도 군사력이 북한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우월한) 현대 대한민국조차도 주요 세출예산 가운데 국방비 비중을 줄이고 사회복지예산을 늘리겠다는 주장에 적지 않은 국민들이 심리적 반발감을 가진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1950년대 전쟁 직후 매우 살벌했던 분단기에 '''군부의 반발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방비를 절감하여 경제발전에 투자한다는 결단은 매우 정치적 의미가 큰 결단이라고 보아야 한다.] 제철소, 조선소, 화학 공장 위주의 산업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경제발전은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조금 뒤의 일이지만 이때는 "한국의 기적"이 [[한강의 기적|남한의 경제발전 과정]]을 뜻하는 말이 아닌 북한의 경제발전 과정을 뜻하는 말이었을 정도였다. 오히려 당시 남한은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가난한 농업국가였다. 심지어 남한은 1960년대 초반까지 미국의 원조를 받았고, 당시 한국 정부 1년 예산의 3분의 2가 미국 정부의 원조로 충당되었다. 만약 미국 정부가 한국에 대한 원조를 끊어버리면, 한국 정부는 당장 돈이 없어서 파산을 선언할 만큼 경제 구조가 취약했다. 이 시기에 북한은 전후복구 사업의 일환으로 협동조합을 통해 농업의 집단화와 영세한 규모의 개인 수공업과 상공업의 국유화를 추진하여 1958년 무렵 이를 완성하였다. 보통 농업집산화에 많은 저항이 잇따르기 마련이지만 북한은 농업집산화에 따른 저항이 별로 없었는데 우익지주층들이 전쟁통에 대규모로 월남하여 저항동력이 사라져버린 이유도 있었고, 무엇보다 전쟁 중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다보니 인적자원의 손실이 많아 과부는 물론이고 노인들, 아이들이라도 끌여와서 농사를 지어야할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개인농 단위로 농사를 짓는것보다 대규모로 농사를 짓는것이 더 낫다고 생각된 것이다. 더불어 [[천리마 운동|인민 노동력의 대규모 동원]]도 이루어졌는데, 이는 때가 아직 "농민과 로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주의 [[지상락원]]"의 선전선동이 사람들에게 먹혀들던 시절이었는지라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지만 단기적으로는 꽤 효과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