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경제/역사 (문단 편집) == [[1940년대]] == 한반도 북부에는 일제 강점기 이래 일본 산업재벌로부터 막대한 [[중공업|중화학 공업]] 투자가 이루어졌었다. 1918년 [[일본제철]]이 겸이포 제철소를 건설하였고, 1930년대에는 일본질소비료[* 현재의 JNC. 명목상 본사는 도쿄에 있는데 핵심 제조거점은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에 있다. 그렇다, 그 악명높은 공해병인 [[미나마타병]]의 원인을 제공한 회사다. 2차대전 당시 일제 징용 노동자들을 착취한 적도 있는 [[전범기업]]이다.]에 의해 당시, 그리고 광복 무렵까지도 아시아 최대의 화학비료 공장이었던 [[흥남비료연합기업소|흥남비료공장]]이 세워진다. 또한, 일제는 압록강에 여러 수력 발전소를 건립해서 [[만주국]]과 [[한반도]]에 전력을 공급했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수력 발전소는 다름 아닌 [[수풍댐|수풍수력발전소]]였다. 하지만 전쟁이 패전으로 끝나자, 일본은 그동안 생산해놓은 막대한 양의 전략 및 보급 물자, 그리고 이것들을 생산하던 공장들을 고스란히 남겨놓은 채[* 물론 이들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것들을 최대한 반출하려 했으나 당시 [[소련군정]]이 불허했다.]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해방 직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자신들도 물자 부족을 겪었어서 그런지 대규모의 재화와 설비, 자원을 반출했다. 1945년 12월 소련 외무부 극동 제2국 참사관 수즈달레프가 작성한 ‘조선에서의 일본의 군비와 중공업에 관한 보고’에 그 같은 사실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 보고서는 ‘북조선의 군수중공업 공장들은 붉은 군대에 대항해 싸운 일본군을 위해 봉사했고 또 붉은 군대의 엄청난 희생으로 쟁취한 것이므로 전리품으로 보아야 한다’고 규정했으며, 소련은 북한 주민들의 생필품까지 모두 공출해갔다. 1947년 미국의 [[앨버트 웨드마이어]] 육군 중장이 대통령 특사로 방한했을 때 북한에서 넘어와 서울에서 활동하던 조선민주당 인사들이 전달한 ‘북조선실정에 관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45년 말까지 소련이 북한으로부터 빼앗아간 물품은 7억∼8억달러에 이르며, 거기에는 쌀 250만섬, 소 15만마리, 돼지 5만마리 외에 북한주민들의 은행예금까지도 모두 포함돼 있었다. 이 보고서에는 수풍발전소 발전기 3대, 원산 석유회사 및 청진 제철공장과 제련소의 모든 기계, 함흥 화학회사의 6만kW짜리 변압기도 소련이 가져갔다고 적고 있다. 실제 수풍발전소 발전설비 철거는 미-소간에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는데, 1945년 11월 미국이 항의각서를 전달하자 소련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수풍발전소에 남아 있던 일본인 기술자는 수풍발전소 발전기 제3, 4, 5호기가 철거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272645|출처]] [[http://egloos.zum.com/nestofpnix/v/4223816|당시 소련군이 북한 지역에서 뜯어간 산업분야 물자 및 산업시설에 대한 목록.]] 그래도 일제의 중공업 기반을 그대로 접수한 북한은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었고, 남북간의 교역이 끊어지게 되자 남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소군정이 다른것은 몰라도 '''물가통제에는 성공했기 때문에 남한은 물론이고 중국, 대만, 일본보다도 재빨리 혼란에서 벗어나서 경제정상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은 일본정부가 돈이 없어 예금을 몰수해서 돈을 갚을 지경이었고, 중국과 대만은 국공내전으로 치안불안과 물가폭등에 시달렸다.] 이는 [[소련군정]] 사령관인 [[이반 치스차코프]]가 정치는 잘 모르는 야전군인이었기 때문에 부하인 연해주 군관구 [[정치장교|군사위원]] [[테렌티 시티코프]]에게 실질적인 군정행위를 일임했기 때문이다. 시티코프는 정치인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식인 행위를 단속하기 위한 기동타격대장 자리도 맡은 인물이었다. 즉 실질적으로 군인이 아니라 정치인에 가까운 사람이 통치를 하니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던것이었다. 반면에 남한은 미군정의 무능한 경제정책으로 인해서 경제정상화는 커녕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려야했고, 경제정상화는 정부 수립 후인 1949년이 되어서야 겨우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로동당]]은 이러한 경제적 배경을 내세워 1946년 무상몰수-무상분배 원칙의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밀어붙여 이를 실현하였다. 한편 남한은 농업이나 경공업 분야로만 철저하게 발달되어 별다른 중공업지대나 심지어 [[발전소]]조차 변변찮아서[* [[당인리화력발전소]]가 당시에도 서울 마포구에 있었기에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남한 자체적으로 [[무연탄]]을 꾸준히 공급할 수단이 없었기에 제대로 된 발전은 불가능했다.] 북한으로부터 받아 쓰는 형편이었다. 때문에 1948년 즈음 북한이 요금 미납을 이유로 [[천연가스 동결|일방적 단전을 강행하여]] 남한에는 그대로 전력난이 발생했다 [* 5월 14일 발생한 단전사건이 유명하며 이를 5.14단전이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을 가진 [[김구]]가 '''"제발 남쪽의 동포를 생각해서라도 남쪽으로 보내는 전기를 끊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부탁할 정도였다.[* 이 말이 결코 이상하지 않은 것이, 남한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던 1960년까지만 해도 서울 시내 가구의 약 39%가, 시골 가구의 무려 80%가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았을 만큼 전력 수급이 매우 형편없었다. 그래서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은 그가 1963년에 낸 책인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서 이승만 정권을 가리켜 12년 동안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력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무능한 정부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격세지감이 정말로 느껴지는 부분. 이 만성적인 전력 부족 현상은 [[미 해군]]의 발전선이 [[인천]]에 정박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심지어 이 당시 남한은 일제의 패전으로 엔화 블록이 박살이 났고, 또한 미군정이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강제 해산하고 어설픈 경제정책을 펴면서 물가가 폭등하여 그나마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던 소비재 중심의 경공업이 크게 휘청거렸다. 또한 북한은 일본으로 귀국하려는 일본인들 중 기술자들을 1948년까지 억류해 그들의 노하우들을 강제로 전수받았고, 이와 동시에 일본이 만들어 놓은 [[군수공장]]에서 [[소총]], [[기관총]], [[박격포]] 등과 같은 기초 병기와 탄약들을 생산해 남침 준비를 하였다. [* 물론 남한에도 조병창들이 몇몇 있었는데 이조차도 [[채병덕]]이 인천(부평)의 조병창이 국군 창설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을 알고 특별 관리를 하여 조병창이 파괴가 되지 않게 관리를 했으나 이후 암암리에 불법 [[화기]]를 생산할 것을 우려한 [[미군정]]이 철저하게 없애버렸다. 그러나 이후 기초 화기의 중요성은 국방부도 알고 있어서 1949 ~ 1953년 사이에 미군정이 파괴한 조병창을 일부 복구하였고 부산에도 조병창을 신설하였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여 부산 지역에 있는 조병창을 제외한 타 지역의 조병창이 개발살난다. 그래도 시범용으로 99식 소총을 참고하여 소수의 국산 소총(대한식 소총)이나 폭탄 등을 제작한 사례가 있었지만 시기적으로 상황이 너무 안좋아서 조악했다. 이후 전후 복구 과정 등을 거치고 시간이 흘러서 이러한 기초 화기를 자체적으로 대량 양산한 시기는 M16 소총을 면허생산을 하게 된 19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가능해졌고 비슷한 시기에 예비군용으로 반자동 소총으로 알려진 M1 개런드를 자동사격이 가능하게 개량한 국산 MX소총을 개발하고 양산할 계획을 잡았지만 더 나은 국산 소총(K-1 기관단총, K-2 소총)을 개발하게 되면서 MX소총은 포기하고 대신 K-1 기관단총과 K-2 소총을 양산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