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 (문단 편집) === [[평양시]]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제1호) 제103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首府)는 [[서울특별시|서울]]이다.''' ([[1948년]] 제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제172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는 [[평양시|평양]]이다.''' ([[1972년]] 제정) "혁명의 수도"라고 북한 당국이 부르는 도시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모든 자원이 집중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모든 평양 시민이 부유층, 상류층이거나 비교적 깨끗한 집에 사는 것은 아니며 이는 위성 사진으로 직접 확인 가능하다. [[https://www.rfa.org/korean/in_focus/food_international_org/furniture-06162014164101.html|재일교포]][* 오죽하면 [[김정은]]의 어머니 [[고용희]]가 재일교포 출신이라는 점이 김정은의 정치적 아킬레스건으로 꼽힐 정도다.] 같이 정치적 하류층도 살며, 다만 충성을 하지 않는가에 대한 감시나 통제가 엄한 편이다. 북한 당국이 대내외적으로 선전하는 평양의 이미지는 평양 외곽의 지원도 가져가는 평양 중심지역의 이미지에 가깝다. 이를 통해 외부에는 북한이 괜찮은 국가라는 주장과, 내부적으로는 더 충성하여 평양에 입성하라는 주장과 당의 정책을 따라야 평양 전반으로 주장되는 평양 중심부처럼 잘 산다는 주장을 각인시키고자 한다. 북한의 형식적 수도는 원래 [[서울특별시|서울]]이었다. 하지만, 소련 육군 제25군 사령관인 육군 상장 [[이반 치스차코프|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차코프]](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Чистяков) [[장군]]이 내린 결정에 의해 평양이 북한의 수도가 되었다. 당시 치스챠코프는 제1극동전역사령관인 키릴메레츠코프 소련 육군 원수의 부름을 받아 제25군 사령부를 평양과 함경남도 함흥 중 어디에 세울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하라고 했다. 치스챠코프가 평양을 선택해 평양이 추후에 수도로 세워지게 될 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만약 그가 당시 함흥을 선택했다면, 함흥이 현대까지 북한 수도로 남고 북한은 '대동강문화' 대신 '성천강문화'를 한반도 역사의 기원이라고 선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1410&num=104336|소련군 상장이 정해준 북한의 수도]] 이후 [[평양시|평양]]이 [[1951년]] '우리 조국의 민주수도'를 거쳐 [[1966년]] 이래 '''혁명의 수도'''로 거듭났으며 1972년 주체사상에 의거한 김일성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하면서 공식적인 수도가 됐다. 이후 평양에서 [[단군릉]]을 발굴하는 동시에 크게 개축하였는데 이는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였음을 내세워 [[김씨조선|김씨 왕조]] 정권의 정통성을 다지기 위한 의도인 듯하다. 서울이 (근세)[[조선]]의 수도로서 500여년 동안 수도였고 그 이전에도 백제가 수도로 삼은 것 외에 수차례 여러 왕조에서 중요한 지리적 거점이었음을 근거[* 교과서에서 삼국의 각축장이었다고 배운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삼국시대 각 국가는 각자의 전성기 때 공통적으로 한강 유역을 꽉 쥐고 있었다.]로 정통성을 내세우는 대한민국과 살짝 대비되는 부분이다. [[참여정부]] 당시 행정수도 논란과 관련하여 경국대전 이래로의 관습헌법을 근거로 행정수도 이전에 위헌 결정을 내렸음을 기억해 보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