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 (문단 편집) == [[북한/역사|역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북한/역사)] [include(틀:한국의 역사)] 1945년 38도선의 이남 지역에는 미군이, 38도선의 이북에는 소련군이 주둔했는데, 당시 소련군이 주둔하던 곳은 [[소련]]의 도움을 얻은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건국했다. 40년대의 건국 초기에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사회주의와의 직접적 연관성마저 부인하는 민주주의 공화국을 표방하였으나 사실은 '[[https://www.uniedu.go.kr/uniedu/home/brd/bbsatcl/nknow/view.do?id=31915&eqDiv=%ED%83%80&mid=SM00000536&limit=10&eqViewYn=true|통일전선전술]]'이라는 상대 정치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공작의 일환이었다. 북한의 건국에는 소련이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자면 아래와 같다. * 공식 건국일인 [[9월 9일]]은 집행권의 최고기관인 내각이 설립된 날일 뿐이었고, 전체 국가의 시발점으로 보기가 어렵다. 그리고 1948년에 나온 우표에서 이 날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으로 표시하지 않고, “중앙정부수립”으로만 표시했다. 그러나 바로 내각 설립 직후에 소련은 북한을 독립 국가로 공식적으로 인정해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테렌티 시티코프]](Терентий Фомич Штыков) 육군 [[중장|상장]]을 주 북한 대사로 임명했다.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1410&num=105706|북한의 건국일이 결정된 유래]] * 소련군 상장이자 제25군 사령관이었던 [[이반 치스차코프]](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Чистяков)는 제1극동전역사령관인 [[키릴 메레츠코프]](Кирилл Афанасьевич Мерецков) 원수의 명령을 받아서 제25군의 사령부를 평양과 함경남도 함흥 중 어디에 세울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했다. 치스차코프가 평양을 선택해 평양이 추후에 수도로 세워지게 될 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http://www.dailynk.com/%ea%b9%80%ec%9d%bc%ec%84%b1%ec%9d%b4-%eb%af%bc%ec%a3%bc%ec%a3%bc%ec%9d%98%ec%9d%b8%eb%af%bc%ea%b3%b5%ed%99%94%ea%b5%ad%ec%9d%b4%eb%9d%bc%eb%8a%94/|북한의 수도가 결정된 유래]] 북한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넉넉하지는 못해도 끼니는 이을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수준은 되었다. 실제로 대한민국이 북한을 생활 수준 면에서 앞지른 것은 60년대 말 70년대 초 이후부터다. 하지만 [[8월 종파사건]]과 박금철 사건 등을 거치며 1인 [[독재]]국가로 변모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서 쇠퇴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정치적 탄압들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 [[6.25 전쟁 학살/인민군과 좌익|6.25 전쟁 중의 범죄]]: 1950년 * [[남로당]] 계열에 대한 숙청: 1950년대 * [[8월 종파사건]]: 1956년 * [[도서정리사업]]: 1967년 * [[갑산파]] 숙청: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 [[프룬제 군사대학 쿠데타 모의 사건]]: 1992년 * [[6군단 반란사건]]: 1995년 * [[황장엽 망명 사건]]으로 인한 숙청: 1997년 * [[심화조 사건]]: 1997년~2000년 * [[장성택]]과 그 계파에 대한 숙청[* [[김정남 피살 사건]] 포함.]: 2013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