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키프로스 (문단 편집) == 역사 == [include(틀:키프로스의 역사)] 1878년 [[베를린 회의]]의 결과로 [[영국]]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키프로스 섬을 할양 받았고[* 베를린 회의 자체는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을 매듭짓는 회의였다. 다만 이때 오스만 제국은 독일이나 영국 등의 '도움'으로 러시아의 일부 요구를 취소 또는 완화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영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도움'에 대한 대가로 키프로스를 요구한 것.], 그 뒤 1925년 직할 식민지를 거쳐 1960년 독립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독립과 동시에 [[UN]]에 가입했다. 이때까지 이렇다할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인구의 약 77%를 차지하는 [[그리스]]계 주민이 정치, 경제적 우위를 점하며 [[튀르키예]]계 주민(약 18%)을 차별하자, 두 민족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그 뒤 1963년, 튀르키예계의 격렬한 반대에도 튀르키예계 주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헌법 개정안이 그리스계 정치세력에 의해 강행되는 사건이 터지면서 민족 대립은 결국 내전으로 번졌다. 튀르키예계 주민들은 수적인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적 모국인 튀르키예에 군사지원을 요청했으나 내전이 국제전으로 번지려 하자 [[UN]]이 제동을 걸고 1964년 안보리 결정에 따라 [[평화유지군]](PKF) 파병을 결정했다. 이로 인해 10년 정도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1974년 7월 15일, 그리스 군사 정권의 지원을 받은 친그리스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마카리오스 3세 정부를 전복시키고 친그리스계 통합파 정치인인 니코스 삼프손(Νίκος Σαμψών(1935.12.16~2001.5.9))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자[* 튀르키예계 키프로스인들과 영국인들은 더욱 더 불안했던게 니코스 삼프손이 바로 키프로스 독립 이전부터 튀르크계와 영국계를 대상으로 [[테러]]와 폭력활동을 저지른 극우단체 EOKA-B의 중역이었고 본인 역시 최소 3건 이상의 직접적인 살인을 수행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처럼 테러단체 수장이 대통령에 오른 것이다!''' 실제로 분위기도 "아이고 맙소사 이제 우린 다 죽었어" 하고 짐싸들고 해외로 도망가는 튀르크계 키프로스인, 영국인도 많았다. 하지만, 삼프손은 전쟁 패배로 인하여 인기를 팍 잃고 사임해야했고 우익 테러로 좌익 단체에 테러혐의 및 민간인 살해 혐의 및 권력 남용죄로 1976년에는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로 튀어버린 탓에 키프로스에는 입국 금지되었다가 1990년이 되어서야 겨우 입국했다. 3년동안 복역하고 가석방되어 키프로스에서 살다가 사망했는데 우익 세력에게는 애국자라고 칭송받지만 좌익 세력에게는 테러리스트라는 비난을 받으며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다.] 분노한 튀르키예는 쿠데타 발생 5일 후인 7월 20일 튀르키예계 주민 보호를 구실로 군대를 보내, 한 달도 채 못 돼 키프로스 영토의 40%에 달하는 북부 키프로스를 점령하고 '키프로스 튀르크 자치정부(Otonom Kıbrıs Türk Yönetimi)'의 수립을 선포했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를 합쳐 30만 명에 육박하는 키프로스 주민들이 졸지에 난민이 되어 남북으로 엇갈려 이동했다. 이후 '키프로스 튀르크 자치정부'는 1975년 '키프로스 튀르크 연방국(Kıbrıs Türk Federe Devleti)'으로 바뀌어 남키프로스에 연방제 국가 수립을 제안했으나 국제적으로 합법정부로 인정받던 남키프로스와 [[UN]]이 이를 거부하자 1983년 '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며 일방적인 분리독립을 선포했다. 그 결과 두 민족이 섞여 살던 키프로스는 북부의 튀르키예계 국가와 남부의 그리스계 국가로 나뉘게 되었다. 그런 뒤, UN과 [[영국군]]의 주도로 가운데에 [[유엔 완충지대]]가 설치됐고, [[비무장지대]]처럼 섬 중앙부가 쪼개져 사실상 국경으로 고착화되었다. 이 상황에서 북키프로스는 현 상태의 존속을, (남)키프로스는 통일을 주장하고 있는데, 양쪽 모두 한 치도 양보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2004년]] 남키프로스가 [[유럽연합]](EU)에 가입했을 때, 일각에서는 새로운 분쟁의 불씨가 될 것으로 우려하기도 했다. [[1999년]], [[UN]]이 남북 키프로스에 조정안을 제시해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튀르키예와 그리스 서로의 민족 감정, 수적으로 크게 뒤지는 [[튀르키예인|튀르키예계]] 주민[* 약 20만 명. 참고로 [[그리스인|그리스계]]는 약 70만 명이다.]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배려의 범위 등의 문제로 갈등이 지속되어 교섭은 아직까지도 합의되지 못하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는데, [[갈라놀레프키|그리스 국기]]를 들고 튀르키예계를 자극한 그리스계 사람을, 튀르키예계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사살한 일이 벌어져서 논란이 된 적도 있다. 그래도 이 곳의 분위기는 남북한만큼 일촉즉발의 상태는 아니며, 니코시아 시내의 경우에는 간단한 절차만 밟고도 양측을 걸어서 오갈 수 있을 정도이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 극우파들은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을 동포라 여기고 '그리스의 힘으로 키프로스를 되찾자'고 외치는데 실현 가능성은 적다. 실제로 [[키프로스 전쟁|1974년에 그리스가 키프로스 전체를 점령하려 했다가 튀르키예의 개입으로 실패]][* 일부 그리스 극우파는 '현재 튀르키예 영토인 동트라키아와 [[이스탄불]](과거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언젠가는 반드시 되찾아야 할 고토'라고 주장하고 있고, 1차대전 직후에 그리스에서 고토 회복(메갈리 이데아)을 주장하며 튀르키예를 침공했다가 실패한 사례가 있다. 동트라케 지방 및 이스탄불은 20세기 초, 현대의 그리스와 튀르키예가 인위적으로 대규모 인구 교환을 하기 전까지 다수의 그리스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막상 그리스에서 차별대우를 받았고 결국 이들 다수가 공산당에 들어가고 그리스 쿠데타 및 여러 어려운 상황에서 그리스에 맞섰다. 거꾸로 그리스에 살던 튀르키예인들도 차별대우가 있다고 여겼는데, 같이 교환되어 그리스로 강제 추방된 그리스인들이 살던 집이나 땅을 가져 살면서 그리스와 달리 그럭저럭 튀르키예에서 잘 뿌리내리고 살았다.]한 전례가 있으며, 현재 그리스와 터키의 양자간 국력과 군사력을 비교하면 그리스가 열세이다. 2015년 통일파인 무스타파 아큰즈(Mustafa Akıncı)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남[[키프로스]]와의 통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며, 같은 해 5월부터 '''통일 협상'''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2년이 넘도록 지지부진했다. 남키프로스계의 배상 및 재산권 요구 등등,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상황에 북키프로스 거주민들 반발도 워낙에 거세기에 사실상 통일은 어렵다는 전망이 많았다. 결국 2017년 12월 통일 협상이 결렬되었다. 지리멸렬한 협상 과정으로 인해 양쪽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반통일 움직임까지 생긴데다가 통일을 추진했던 양쪽 지역 정부 실권자들의 임기가 끝나고 정권마저 교체되는 바람에 키프로스 재통일은 다시 머나먼 미래의 일로 미루어졌다. 2020년 10월 18일에 북키프로스 대선에서 다시 통일 반대파인 에르신 타타르 총리가 승리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3&oid=003&aid=001013278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