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양해군 (문단 편집) == [[현실은 시궁창]] == 하지만 이러한 위세 이면에는 여러 문제점이 숨어 있었고, 그 문제점이 끝내 북양해군의 파멸을 이끌어내고 만다. * 서양식 군비를 갖추기 위해 서양에서 최신 군함과 장비를 사들이고 교관을 불러들인 것은 좋았지만, 문제는 이걸 쓸 청나라군의 상태가 형편없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훈련을 시킬 외국인 교관을 초빙했지만 당장 의사 소통부터 어려움을 겪는 형편이었다. 훈련소에서 교관이 외국어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여기에 내부 비리도 심해서 수병들에게 제식훈련만 시킬 것도 아니고 포도 쏘고 항해도 나가봐야 할 터에 예산이 줄줄 새고 있으니 훈련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 함대는 근대식이지만 [[청나라]]는 아직 근대화되지 못해서 옛날 방식, 즉 전근대식으로 함대를 운영했다. 인적 자원의 질만 따지자면 당시 북양해군의 지휘관들은 영국 등 해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들이 상당수 있었으며 마미 선정 학당 같은 교육 기관에서 제대로 배운 장교들도 여럿 있긴 했다. 그러나 청군의 체계는 여전히 명나라를 무너뜨리던 그 방식대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좋은 함대를 옛날 방식으로 굴렸으니 이 부문에서도 효율이 팍팍 떨어졌다. 북양대신 [[이홍장]]은 원래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면서 뜬 사람이라서 육전에 대한 이해도는 좋을 지 몰라도 함대 운용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었고, 이홍장이 북양수사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한 정여창 역시 육전 능력은 있었지만 해군에 대해서는 근대적인 교육을 받지못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청나라 말기의 부패 현상이 너무 심해서 함대 유지 및 보수에 대한 예산이 크게 부족했다. 이건 국방비를 삥땅쳐 놀고먹는데 쓴 [[서태후]]의 탓이 가장 크지만, 이를 제외하고 봐도 전체적으로 당시의 부패상이 너무 심각해 함대의 설립자인 [[이홍장]]도 이를 어찌하지 못했다. 전투 시 함대 운용 전술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당장 탄약이 없어서 개전 직전에 소량이나마 탄약을 채워넣을 지경이었고 이를 해전 한번에 전부 사용할 수는 없었기에 정여창은 출격하면서도 상당수의 탄약을 보급창에 남겨둔 채로 원래 보유할 수 있는 탄약량보다 적은 양만 가지고 해전에 임했다. 북양해군의 자랑거리이자 주력인 정원/진원의 12인치(305mm)함포 포탄마저 양이 부족해서 화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으니 말 다했다. * 최신식 전함을 유지 및 관리할 역량이 청조에 있었는지의 여부도 의심스럽다. 독일은 중국애들이 이 전함들을 제대로 다룰지의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여기에 전술했듯 주포는 탄약마저 부족해서 도입 초기부터 탄약이 부족한 상태로 오랫동안 예산 부족에 시달리다가 청일전쟁 발발 전에야 겨우 어느 정도 탄약을 추가 구입한 실정이었다. 이 탓에 교전 시에 제대로 된 포탄조차 갖추지 못했는데, 어느정도냐면 '''함대는 물론이고 [[해안포]]에서 쏘는 포탄도 제대로 된 [[철갑유탄]]이 아니라 터지지 않는 불발탄이었다. 포탄 안에는 석탄 가루/진흙/모래/콩이 화약 대신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http://blog.daum.net/shanghaicrab/12196379|#]] 여기에 수뇌부의 소극적인 지휘까지 합쳐지는 바람에 기존에 확보해놨던 철갑유탄이나 어뢰도 짱박아두고 되도않은 불량 포탄이나 쏴댔으니 명중시켜봤자 타격을 입힐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구조적인 문제도 있어서, 그 엄청나다던 12인치 포탑도 말이 포탑이지 사실은 상부가 훤하게 노출된 노출형 포대였기 때문에 덕분에 속사포를 가진 소형함에도 쉽게 제압당할 수 있었다. 물론 해당 군함을 인도할 시점에서는 영국 해군의 신형 전함들 중에서도 주포가 노출형 포대에 탑재된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하지만, 당시의 해군 군함의 발전 속도가 매우 빨라서 이미 몇 년 지나지도 않아서 이는 완전한 구식으로 전락한 주포 탑재 방식이었다. 그래서 훗날 뚜껑을 덮는 방식으로 간신히 문제점을 해결해 1894년 황해 해전 당시에는 장갑화된 유개 포탑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그 부작용으로 안그래도 느린 포탑 선회 속도가 더 느려졌다. * 북양해군가 소유하던 대구경 주포의 숫자는 일본 함대를 압도하였으나, 소구경이나 중구경 속사포의 숫자에서는 매우 열등하였고 함선의 경우도 정원과 진원을 제외하면 일본 함대가 약간 우월했다. 이 시기에는 아직 [[협차]]나 [[일제사격]]같이 대구경 주포의 명중률을 높이는 기술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구경 주포는 원거리에서는 느린 발사 속도와 조준 속도로 인해 명중이 불가능에 가까워서 근거리에서 치명타를 먹이는 용도로 사용되던 상황이라는 점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문서를 참조. 청나라 측에서도 이를 모르지는 않아서 정여창 등이 계속 소, 중구경 속사포의 구입 및 배치를 요구했으나 무시당했다. 결국 전투에서 정원과 진원은 당시의 느린 대구경 주포 발사 속도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최대의 발사 속도를 보여줬으나 대부분 빗나갔고, 반대로 일본군은 속사포를 마구 쏴대서 대부분의 함선들이 포에 얻어맞고 전투력을 상실했다. 이미 이 시점에서 해전은 참패한 것이다. 정원과 진원 역시 예외는 아니라 정원이 159발의 명중탄을 맞을 만큼 속사포에 마구 얻어터졌지만 원체 튼튼한 최신함이라 멀쩡했다. 전사자가 17명밖에 안 나왔을 정도로 건재했기에 사방이 포위당한 상황에서도 정원과 진원의 저항은 계속되었지만 사령관이 포의 반동으로 부상을 입는 희대의 개그장면이 나오는 바람에(...)[* 대구경 함포의 후폭풍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 때문에 크면 클 수록 후폭풍 역시 강력하기에, 보통은 안전지대 대피를 확인한 다음 쏘는데, 도대체 '''사령관'''이란 작자가 함교 같은 지휘하기 좋고 안전한 내부공간에 얌전히 있지 않고 어디서 뭘 하다가 '''포의 반동으로 부상'''을 당한걸까?(...)] 전투지속은 불가능했고 결국 독자적으로 전장에서 탈출한다. 북양해군의 화력은 절대 나쁘지 않아서 대구경 포를 보유한 덕에 어그로를 크게 끌었던 일본군 기함 마츠시마가 진원의 305mm 포에 직격, 대파당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오죽하면 중상을 입고 죽어가던 일본 수병이 '정원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라는 유언을 남겨 이 에피소드로 군가까지 만들었을 정도였다.[* 죽어가던 수병이 옆의 부장에게 '정원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라는 말을 남겼고 부장은 전투 불능이 됐다며 안심시켰다. 이에 그 수병은 옅은 미소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군가의 줄거리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마츠시마를 대파시킨 건 진원인데 왠지 정원이 일본인들의 어그로를 끌며 유명세를 타고 있다.] * 북양해군의 승무원들은 열심히 전투에 임했으나, '치원' 함장 등세창 및 일부 장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장교들은 그렇지 않았다. 함장을 맡은 고급장교들 역시 예외는 아니라 자신의 함선이 잘 싸우고 있는데도 전장에서 임의로 도주하는 역적짓을 했다. 싸워야 할 놈들이 쫄아서 도망치는데 암만 엘리트들을 배치한들 무슨 소용인가. 결국 이것도 패배의 큰 원인이 된다. 일례로 황해 해전 당시 북양해군의 좌익을 맡았던 순양함 중 하나인 '제원'은 전투 중 '치원'이 격침된 이후 바로 적전 도주했다. ' 제원'의 함장은 당시 중국의 기대주로 영국 유학까지 다녀왔음에도 이랬다. 요컨대 겉보기로는 최강이었지만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