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선개척사업 (문단 편집) === 1920년대 후반기 === 1924년 6월, [[일본]]에서는 [[가토 다카아키]] 내각이 출범하였고, 시모오카 주지(下岡忠治) 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개발정책인 ‘산업제일주의’라는 일종의 [[슬로건]]을 주창한다. 이 [[슬로건]]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시모오카 정무총감은 북선지역에 주목한다. 시모오카 역시 북선지역을 두고 개발의 필요성을 인지하였는데, 시모오카는 앞선 총독부 관계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슬로건]]인 ‘산업제일주의’를 북선지역에서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재정난을 겪더라도 북선개발에 예산을 쏟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기도 하였지만, 뒤에 후술하겠으나 조선사업공채[* 조선사업공채의 정확한 법적 정의를 찾기 위해서는 조선사업공채법 조선총독부법률 제62호 1조 참조.]의 삭감 움직임과 맞물려 이를 곧바로 실현시키지는 못하였다. 물자 수송이 철도와 항만 설비 부족으로 인하여 여전히 한계가 있었던 점 또한 북선개발을 즉시 시행할 수 없었던 원인이었다. 시모오카가 1925년 급사한 뒤 후임 정무총감으로 부임한 유아사 구라헤이(湯浅倉平) 또한 ‘산업제일주의’를 계승하여, 동시에 [[함경도]] 지역의 수력발전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마침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공업이 발달하던 시기라 [[일본]] 당국의 전력수요가 급증하고 있었고, 북선 지역의 전력 생산 가능성이 구체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는 1925년 [[부전강]]에서, 장진강전력주식회사는 1926년 [[장진강]]에서 각각 수력발전소 건설권을 허가받게 된다. 이때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는 부전강 수력 개발 사업을 위해 조선수전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되고, 1931년 [[부전호|제1발전소]]를 완공하여 이때부터 수력발전이 시작되었다. 후술하겠으나, 이것이 1930년대에 구체적으로 진행된 “북선개발”의 원동력이 된다. 지속적으로 지적받은 교통 문제 또한 구체적인 정책 단위로 관심을 받게 된다. 1927년 시행된 조선철도12년계획의 5개 신설 구간 중 만포선, 도문선, 혜산선, 동해선 북부 구간이 [[조선]] 북부에 해당하는 노선인 점을 통해 북선지역의 철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1910~1920년대 초 착공한 함경선이 1928년 원산-[[회령]]간 전 구간 개통되기도 하였다. 길회선 종단항을 둘러싼 청진, 웅기, 나진항 사이의 경쟁 구도 또한 북선지역의 개발 열기를 촉진하였다. 당시 북선 지역은 투자가 등한시되던 곳이었는데 [[함경선]]이 개통됨에 따라 [[식산은행]]이 북선지역에 대한 대출 비중을 늘렸고, [[조선총독부]]에서도 북선지역에 대한 농림업 차원의 조사를 진행하는 등 북선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