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북경정변 (문단 편집) === 2차 직봉전쟁의 발발 === 1924년 9월 3일, [[안휘군벌]]인 절강독군 [[루융샹]]과 [[직예군벌]] 사이에서 [[강절전쟁]]이 일어나자 봉천의 [[장쭤린]]은 루융샹과의 동맹관계를 이유로 관내진출을 행했다. 이에 대총통 [[차오쿤]]은 9월 10일 우페이푸를 베이징으로 불러들이고 9월 17일 장쭤린 토벌령을 내리고 우페이푸를 토역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본격적으로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우페이푸는 육군검열사 펑위샹을 3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적봉으로 나와 고북구, 승덕을 경유해 동몽골 지역으로 돌아 봉천군벌의 배후를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만약 승리한다면 펑위샹에게 흑룡강성을 주겠다고 구슬렀다. 이에 펑위샹은 유기를 통해 대외적으로는 중앙의 명령에 복종하여 출병하겠다고 선포하여 우페이푸를 안심시켰지만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인 장소증을 통해 마병남에게 실은 병력 이동을 하지 않을 것이니 장쭤린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전했다. 장소증은 신해혁명 시절에 20진의 통제로 펑위샹과 친분이 깊었다. 그런 장소증을 통해 마병남은 [[양위팅]], [[장쭤린]] 등에게 펑위샹의 계획을 전했고 이에 장쭤린과 양위팅은 장소증, 펑위샹, 근운붕에게 편지를 주어 만약 평화가 이루어진다면 산해관을 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풍군과 봉군이 접전한다면 허공에만 사격하여 서로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며 풍군이 홍포 완장을, 봉군이 흑포 완장을 차서 서로 식별하기로 하였다. 1924년 9월 13일 조양사 전투를 시작으로 열하, 산해관 전역에서 봉천군대가 잇달아 승리하였다. 우페이푸가 직접 산해관으로 나아가 독전했지만 현대화와 장교 육성을 통해 강력해진 봉천군벌을 이기기는 쉽지 않았다. 우페이푸가 공군과 해군을 동원하여 봉천군의 배후를 기습하기 위한 계획을 짜는 동안 후방에서는 펑위샹이 그간의 원한을 설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펑위샹은 2로군 1사단장 호경익과 15혼성 여단장 손악과 모의하였다.손악은 [[안직전쟁]], [[1차 직봉전쟁]]에서 군단 교육단단장, 직예 의용군 사령관 등을 역임하며 군공을 쌓았지만 15혼성 여단장과 대명 진수사 자리만 얻어 우페이푸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1924년 9월, 손악은 펑위샹이 건립한 소충사 낙성식에 참여하여 직예군벌에 반기를 들 '초정밀의'라는 비밀논의를 하였다. 여기에 펑위샹, 손악의 친구인 호경익은 심복 악유준을 보내 여기에 끼어들었다. 북방의 전황이 직예군벌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펑위샹은 차오쿤에게 왕회경의 13사단이 전방으로 출동하여 베이징의 방위가 비었으니 손악의 15혼성여단을 불러들여 베이징을 사수하자고 건의했고 차오쿤은 동의하여 연합경기경비부사령관에 임명했다. 손악은 베이징에 입성하여 펑위샹에게 이렇게 말했다. >"특별히 저를 베이징으로 오게 한 것은 성문을 열어 두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9월 17일 3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펑위샹은 18일 장지강 여단을 선두로 열하를 향해 출병, 이어 [[쑹저위안]], 유욱분, 이명분 등을 잇달아 보내고 마지막으로 녹종린을 보내 24일까지 부대를 모두 출격시켰고 1개 중대를 베이징 성내 전단사에 주둔시키고 심보고 장홍우를 베이징 위수 사령 겸 병참총감으로 삼아 후방을 지키게 하고 하남에서 신병 1만명을 모집하게 하여 3개 여단을 보충하여 손량성, 장유새, 장홍우 여단에 나누어 배치하고 훈련이 덜 끝났다는 구실로 출병시키진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