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활(밴드)/역사 (문단 편집) === '디 엔드' 시절과 '부활'의 탄생 === 1984년 4월 [[김태원(음악인)|김태원]](기타 겸 보컬), [[이태윤]][* 현재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s-1]]'과 [[다섯손가락]]의 베이시스트이며, 사실 위대한 탄생 경력 이전에 국내 세션 베이시스트 중에서 그야말로 '탑 오브 탑'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디 엔드' 시절과 부활 초기에 [[베이스 기타|베이스]] 겸 보컬이었다. 김태원이 추구하던 헤비메탈보다 소프트 록을 좋아해서 탈퇴했다고 한다. 훗날 2010년 [[https://www.youtube.com/watch?v=sG6Hwla8OUs|남자의 자격 초심 특집]]에서 이 디엔드 시절 맴버들을 모았을때 언급하길 본인과 김태원이 인간적으론 사이가 좋았지만 음악적 견해가 당시엔 심했다고 하며, 특히 1대 보컬로 영입되는 김종서에겐 미안한 소리지만 배뱅이굿(...) 같은 그의 창법이 개인적으론 싫었다고 한다. 때문에 취향에 더해 비공식이긴 했지만 기존 보컬도 많이 맡던 본인의 입지가 줄어드는 섭섭함도 있어 이태윤은 결국 부활을 탈퇴하게 된다.](베이스 겸 보컬), 이지웅(기타), 황태순(드럼)이 결성한 '디 엔드'가 시초이다. 1983년 겨울, 서대문 '서문악기사' 악기 연습실에서 기타를 연습하던 김태원과 트럼펫과 베이스를 연습하던 이태윤이 서로 만나게 되었다. 당시 김태원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이태윤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때였다. 이태윤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하던 다른 밴드 소속이었으며, 조용필, 윤수일 등의 가요를 합주했었다고 한다. 김태원과 이태윤은 서로의 악기 실력을 높이 평가하며 함께 합주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김태원은 1984년 고등학교 졸업 무렵 지방 야간 업소[* 드라마 락락락에서 묘사하기로는 용인 관광 카바레, 마산 카바레 등의 나이트 클럽.]에서 기타 연주자로 일했으나 술 취한 손님들의 횡포나 월급 압류[* 한번은 밴드마스터가 선불금을 들고 날랐고, 이에 업소측이 김태원 포함 남은 인원들의 악기를 보증 비슷하게 압류해갔다고 한다.], 본인이 추구하던 장르와는 거리가 먼 음악 연주만 해야 하는 지루한 현실 등에 회의를 느끼고 스무살 무렵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김태원과 이태윤에 이지웅, 황태순이 합류하여 1984년 4월 7일 '디 엔드'를 결성했다.[* 결성 시점에 대해서는 멤버들마다 증언이 약간 차이가 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장면인 The End에서 감명받은 김태원이 그룹명을 지었다고 한다. 디 엔드는 당시 다른 락밴드와 마찬가지로 카피밴드로 활동하였는데, 지미 핸드릭스의 리틀 윙(Little Wing), 게리 무어의 엠프티 룸(Empty Rooms) 등을 공연했고, 보컬은 이태윤이 주로 담당하면서 김태원이나 다른 멤버들도 돌아가면서 맡았다. 1985년 종로에서 열린 밴드 연합 콘서트에서 감명받은 백강기가 디 엔드의 매니저를 자처하였다. 한편 [[시나위(밴드)|시나위]] 출신의 [[김종서(가수)|김종서]]가 시나위에서 해고당한 후[* 오디션 겸으로 첫 공연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 혼자 느낌에 취해서 음정 가는줄도 모르고 막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직후에 리더 [[신대철]]에게 해고당했다. (이후 시나위 1집에 보컬로 합류하는게 [[임재범]]이었다. 다만 신대철도 나이가 들어서 보니 뭘 이런걸로 탈퇴를 시켰을까 후회하기도 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자기가 좀 꼰대였다고.) 김종서가 시나위에 정식으로 재가입한 것은 부활을 탈퇴한 후이며 [[Down and Up|시나위 2집]]부터인데, 김종서는 이때 탈퇴당하고 자기 부족함을 깨달아 다리 밑에서 노래 연습을 엄청 했다고 한다. 이후 확정된 밴드 없이 객원보컬 비슷하게 여러 밴드를 전전하다 검은진주라는 팀에서 노래하던 당시 디엔드(부활)에 스카웃된 것.] 여러 밴드를 거치며, [[작은하늘]]과 자신의 대학 선후배로 구성된 검은진주라는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1985년 같은 콘서트에서 디 엔드와 김종서가 이끄는 검은진주가 각각 공연을 했고, 콘서트 후 김태원 등 디 엔드 측이 김종서에게 보컬을 제의했고, 김종서가 이를 수락하여 합류하게 되었다. 훗날 김태원, 김종서가 각각 방송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미 이전부터 김태원과 김종서는 서로를 알고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태윤에 따르면 김태원은 이미 작은하늘의 김종서를 알고 디 엔드에 영입하고자 했는데, 이태윤은 김종서를 영입할 경우 밴드가 지나치게 헤비메탈로 치우칠 것을 우려해서 처음에 김종서의 영입을 반대했었다고 한다. 한편 김종서는 디 엔드 쪽에서 김태원과 매니저 백강기 등이 찾아와서 영입 제의를 했을 때 매니저까지 있는 나름 메이저팀인 디 엔드에서 영입 제의를 한 사실에 속으론 좀 놀랐었다고 회고했다. 김종서의 가입과 함께 1985년 7월 3일 밴드명을 '''부활로 개명'''했다. 김종서는 합류의 조건으로 양측이 각각 디 엔드, 검은진주라는 기존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지을 것을 제안했고, 그리하여 부활로 그룹명을 바꾸게 되었다.[* 부활이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는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데 드라마 락락락에서는 드러머 황태순이 지었다고 나왔으나 그 당시 매니저이던 백강기는 본인이 지었다고 출간된 책에서 밝혔다. 매불쇼에 출연한 김태원은 이태윤이 명명했다고 밝혔으며, 이태윤 본인 또한 유튜브를 통해 자신이 지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VtEZTu6los|13분부터]].] 이후의 부활 공연도 잘되서, 김종서가 회상하길 앨범 한장 안낸 밴드가 유명가수 카피 공연만 하는데도 공연만 하면 매진이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당시 언더그라운드 록밴드들의 성지인 파고다 예술극장에서 그 해 자체 최다 콘서트 인원 기록까지 세우고 1985년 부활은 보컬상까지 받게 된다. 이 당시 부활의 공연은 1, 2부로 구성되었다. 김종서를 제외한 4명 멤버의 기량을 뽐내는 1부, 그리고 김종서가 등장하여 훌륭한 로버트 플랜트 카피로 마무리 짓는 2부로. 1985년 부활은 파고다의 수많은 밴드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으며 이 때부터 강남엔 [[시나위(밴드)|시나위]], 강북에는 [[부활(밴드)|부활]]이라는 이야기기가 생겨났다. 또한 당시에는 양 기타리스트 김태원과 이지웅의 비중이 거의 비슷했다. 카피곡의 솔로는 대부분 이지웅이 도맡아 했고 자작곡의 솔로는 김태원의 분량이 조금 더 많았다. [[파일:디엔-horz-horz.jpg]] 왼쪽부터 김태원(기타), 김종서(보컬), 황태순(드럼), 이태윤(베이스). 이지웅은 사진에 없다. 그러나 김종서가 부활로 활동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아 김종서와 이태윤이 동시에 탈퇴했다. 김태원, 김종서, 이태윤 등이 방송과 유튜브 등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누가 리더를 맡을 것이냐 등 밴드 주도권을 둘러싼 알력다툼[* 당시 1~2살 더 많은 큰 형님 이지웅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의 나이가 거의 같았고 20대 초반이라서 알력 다툼이 있었다고 놀러와 등에서 김태원, 김종서 등이 밝힌 바 있다. 초기에는 밴드 리더를 굳이 공식화할 필요도 없었고 서로 마음이 맞아서 함께 밴드를 시작한 것이었지만, 점차 밴드가 유명해지고 공개 활동이 늘어나면서 방송 출연시 누가 리더냐고 물으면 서로 자기가 리더라고 하는 통에 누구를 공식 리더로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것. --방송사가 문제다?-- 사실 리더 없이도 잘 굴러가는 밴드도 있는걸 생각하면 괜한 리더 분쟁으로 팀이 깨진 측면도 있다.], 음악적 지향성에 대한 견해 차이, 매니저였던 백강기의 강압적인 관리 방식[* 이 매니저가 훗날 [[이승철]]-부활 갈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백강기'이다. 여담으로 백강기는 부활 30주년이 넘은 시기에도 페이스북에 '이승철with부활' 또는 '이승철&부활'이 맞는 표기라는 드립을 쳤다.]에 대한 보컬 김종서 등의 반감 등이 원인으로 언급되었다.[* 김종서는 당시 매니저였던 백강기가 담배도 못 피게 하는 등 당시 본인 기준 지나치게 강압적으로 관리해서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이후 김종서는 매니저가 보컬이 담배를 못 피게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행위였으나, 당시 자신은 갓 스물을 넘긴 젊고 혈기 넘치던 시절이었고, 당시 락을 하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기기까지 하던 시절이기에 매니저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종서의 경우 매니저의 규제와 억압이 가장 큰 불만이었다고 말했고, 이태윤은 음악적 지향성 차이 및 보컬에서 소외된 것이[* 김종서의 --배뱅이굿-- 창법도 미안하지만 본인 취향엔 안맞았다고 한다.] 가장 큰 원인이라고 말했다. 디 엔드 이전에 이태윤은 조용필 등 가요를 합주하는 것을 즐겼고 부활 결성 이후에도 소프트락과 퓨전 재즈 등에 관심이 많았지만, 김태원은 [[지미 헨드릭스]]에 경도되어 있었고[* 그중에서도 속주뽕에 빠져있었던 모양. 이태윤 왈 당시 일본 유명밴드의 기타리스트 [[타카사키 아키라]]를 넘어서겠다는 의미로 내가 쫓아버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종서가 합류하면서 부활이 지나치게 헤비메탈로 기울게 되어 밴드 활동에 의욕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반면 김종서는 반대로 자신의 장기인 헤비메탈을 추구했었지만[* 김종서는 본인의 음악적 취향은 헤비메탈 뿐만 아니라 퀸 등 다양한 음악에 걸쳐 있다고 말했고, 실제로도 솔로 가수로 데뷔한 후 정통 메탈이 아닌 대중적인 음악을 추구했다. 하지만 김종서의 목소리는 당시 자타가 공인하듯 한국의 로버트 플랜트라 불렸고, 김종서가 본인의 음악적 성향과 관계 없이 메탈을 추구하게 된 건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에 비해 부활은 온건한 락을 추구했었기 때문에 정통 메탈을 추구하는 시나위 등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고 한다. 결국 둘 다 정반대의 이유지만 결과적으론 비슷한 이유로 탈퇴한 셈. 그렇게 김종서와 이태윤이 탈퇴한 뒤, 이태윤의 고등학교 후배로 연습실에 자주 놀러오고 공연 때 스태프로도 활동하던 동네 후배 [[이승철]]이 1985년 말에 부활 보컬 공개 테스트를 받게 된다. 당시 부활에 오디션을 봤던 사람들이나 부활과 안면을 트고 지내던 뮤지션들의 증언에 의하면 몇 차례 보컬들을 섭외했으나 대부분 김태원의 맘에 들지 않았고, 혹은 맘에 들어서 스카웃하러 가면 이미 다른 밴드나 기획사 소속이라 잘 안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계속 부활에 들어가고 싶다고 어필하던 이승철한테 노래를 시켜봤더니 생각보다 잘했고, 그래서 이승철을 몇 차례 객원보컬 형식으로 쓴 후 정식으로 보컬로 기용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승철은 훗날 본인 홈피에 어머니 돈줄 덕에 보컬이 될 수 있었다는 식의 농을 치기도 했는데, 당시 고가의 신디사이저를 사들고 밴드에 가입한 건 사실이었다.] 참고로 이승철이 김태원에게 처음 인정받은 노래가 딥 퍼플의 'Soldier of Fortune'이라고 잘못 알려져있는데, 사실 처음 부른 노래는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라고 한다. 2003년에 부활 8집 발매 이후 가진 콘서트 영상에서 김태원과 이승철이 Soldier of Fortune을 부르면서 앞에 멘트를 통해 이 곡을 처음 부른 것처럼 말했는데, 이 라이브의 멘트 때문에 Soldier of Fortune이 오디션 첫곡인 것처럼 알려진 듯. 공연 멘트를 재밌게 하려다보니 이런 멘트가 나온 듯하다. 이태윤이 나간 베이스 자리에는 당시 대학연합밴드에서 활동하던 기타리스트 김병찬을 영입했다. 이태윤에 따르면 당시 김병찬은 연합밴드의 기타리스트였으나 김태원이 설득하여 베이스로 전향시켜 부활로 영입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2대 보컬 이승철과 김병찬을 영입한 후 1986년 부활은 '''1집 앨범 준비'''에 들어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