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부원지쟁 (문단 편집) === [[장훈복벽]] === 한편 [[장쉰]]은 5월 21일 5차 서주회의를 개최한 상황이었는데 돤치루이 면직 소식이 들리자 <총통 제거안>을 회의에 상정하여 각 성의 독립의 선포를 선동했다. 돤치루이도 안휘성장 [[니쓰충]], 봉천독군 [[장쭤린]], 산동독군 [[장회지]], 하남독군 [[자오티]], 직예독군 [[차오쿤]] 등을 사주하여 리위안훙 타도를 준비하였다. 이에 따라 5월 29일 안휘독군 니쓰충이 안휘를 시작으로 하남독군 자오티, 직예독군 [[차오쿤]], 봉천독군 [[장쭤린]], 섬서독군 [[진수모]], 절강독군 [[양선덕]], 복건독군 [[리허우지]]가 독립을 선포, 중앙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하였으며 길림, 흑룡강, 산서도 뒤따랐다. 돤치루이는 톈진으로 물러나 환계 군벌과 연구계, 교통계를 규합하여 리위안훙 타도와 국회 해산을 모의하는 한편 텐진에 각성 군무총참모처를 설치하여 임시정부와 임시의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6월 2일 텐진에서 독립각성총참모단이 조직되어 리위안훙에게 압력을 가했다. 리위안훙은 5월 25일 국회에 출석하여 재정총장 [[리징시]]를 국무총리에 임명하고 왕시젠을 접견하는 등 분주히 움직였다. 5월 26일 중의원이, 5월 27일 참의원이 리징시 임명안에 동의했다. 리위안훙은 [[량치차오]]에게 베이징에 올 것을 청하는 등 어떻게든 파국을 막으려 했으나 운남의 탕지야오 정도를 제외하면 리위안훙을 도우려는 군벌은 아무도 없었다. 5월 28일, 리징시 내각이 출범했으나 리징시는 아직 베이징으로 올라오지도 못한 상태였고 돤치루이를 막을 힘이 없던 리위안훙은 6월 1일 안휘독군 [[장쉰]]에게 조정을 요청했다. 장쉰은 이를 받아들이는 척, 톈진으로 올라와 [[쉬스창]] 등 복벽파와 회동한 후 난데없이 리위안훙에게 국회가 있는 상태에서는 조정이 불가능하다며 48시간 안에 국회를 해산할 것을 요구했다. 저항할 힘이 없던 리위안훙은 어쩔 수 없이 6월 12일 국회를 해산했고 약법 체제도 폐지되었으며 토론 중이던 헌법도 다시 유산되었다. 이 기세를 몰아 장쉰은 7월 1일 [[선통제]] 복위를 선포하였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복벽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어디까지나 리위안훙 타도를 원했지 선통제를 등에 업고 장쉰이 설치는 것을 봐줄 이유가 없었고 교통계, 연구계 등은 군주제에 단호히 반대하는 세력이었으므로 당연히 장쉰 토벌을 요구했다. 돤치루이는 즉각 리위안훙, 펑궈장과 연합하여 국무총리에 복직한 다음, 토역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장쉰의 변자군을 토벌하여 7월 12일 베이징을 점령하고 복벽을 취소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