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원지쟁 (문단 편집) === 총통과 총리의 대립 === 국회에서 헌법 제정 문제로 싸우는 사이에 정부 내부에서도 리위안훙과 돤치루이의 대립이 이어졌다. 근본적으로 중화민국 임시약법은 내각책임제를 표방하면서 대총통과 국무총리의 권한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총통과 총리의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약법 상 대총통에게는 법률 공포, 선전, 화평, 군통수권 등 막강한 권한이 있긴 했으나 행정적으로는 국무총리에게 책임이 있었으며 국무총리는 대총통이 아니라 국회에 책임을 졌다. 군통수권 문제에 있어서도 군정권은 육군부가, 군령권은 참모본부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대총통이 통수권을 행사할 건덕지가 없었다. 여기에 리위안훙과 돤치루이의 성향 차이가 갈등에 기름을 부었다. 리위안훙은 신해혁명 직후부터 공화당을 조직하는 등 정당정치와 의회에 호의적인 인물이었고 돤치루이의 위세를 우려했기 때문에 [[직예군벌]]의 수장인 부총통 겸 강소독군 펑궈장과 연계하여 돤치루이를 견제하려 했다. 돤치루이는 돤치루이 대로 안휘파의 정국 장악을 위해 리위안훙과 충돌했다. 게다가 리위안훙과 돤치루이는 원래도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돤치루이는 펑궈장을 일개 여단장 출신이라고 깔보면서 경력면에서 형편없는 인물이라고 무시했고 자신 덕분에 대총통이 된 '정치포로'로 간주했다. 반면 리위안훙은 자신의 호북도독 지위와 군사기반을 돤치루이가 박탈했다는 점에서 불만이 많았다. 이들 사이의 불화는 단순한 정책 문제를 떠나서 돤치루이가 리위안훙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드러났다. 돤치루이는 리위안훙을 단순히 '결재기관' 정도로 보고 우습게 알았다. 돤치루이는 자신의 친구이자 심복인 [[쉬수정]]을 비서장을 임명했는데 쉬수정은 리위안훙의 결재가 필요할 때 언제나 대리인을 보내 결재를 받았고 본인이 직접 가도 불손한 태도로 리위안훙을 대해 리위안훙의 불만을 샀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리위안훙이 지방장관 임명건에 대해서 그들의 출신과 경력을 묻자 쉬수정은 총통이 그런 것을 알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 총통부비서장이 사직하면서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국무회의 후 보고도 없고 영을 발표해도 총통은 그 뜻을 몰랐으며 관리를 임명해도 총통은 그의 경력을 몰랐다. 대총통은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없이 날마다 결재하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는 것이 직무를 다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에 반발하여 리위안훙은 군사권을 육군부에서 회수하여 총통부에 귀속시키려고 시도하다가 돤치루이와 연구계의 반발에 실패하기도 했으며 법률 제정, 공포, 이행, 관리 임면권에 있어서 계속 충돌했다. 리위안훙에게 있어서 자신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재를 거부하는 것이었는데 리위안훙은 이 점을 노려 1916년 10월, 쉬수정과 사이가 좋지 않은 내무총장 손홍이를 돤치루이가 파면하자 거부권을 행사했고 이후 대독절교안에도 거부권을 행사하며 국무원의 행정능력 마비를 유도했다. 돤치루이 역시 리위안훙에게 불만을 품었기 때문에 리위안훙을 타도하기 위해 독군단을 조직하였다. 각 성의 군사력을 장악한 독군들을 장악함으로 자신이 중국의 지배자가 되려는 속셈이었다. 돤치루이는 안휘성 독군 [[장쉰]]과 결탁하여 9월 20일[* 혹은 9월 21일.] 제2차 서주회의를 개최, 13개 성의 독군을 모아 독군단 성구연합회를 조직하고 장쉰을 맹주로 추대했다. 그런데 장쉰은 청조의 복벽을 주장하는 인물로 돤치루이와 딴 마음을 먹고 손을 잡은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들 독군단은 돤치루이에게 협조하여 1917년 1월 9일, 펑궈장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여러 독군이 난징에 모인 기회를 이용하여 3차 서주회의를 개최, 돤치루이 지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한편 1916년 출범한 [[일본 제국]]의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은 돤치루이를 지지하며 돤치루이가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을 제공했다. 조선은행 총재 쇼다 가즈에와 그의 개인비서 니시하라 가메조 등이 돤치루이 지지를 주장하여 1917년 1월 교통은행 차관 500만 엔을 제공했고 이후 [[니시하라 차관]]이라는 매국적 차관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돤치루이는 1917년 3월 중화구락부를 조직하여 어용정당을 만들고자 했는데 이 중화구락부는 훗날 [[쉬수정]]의 주도로 안복구락부로 개조되어 안복국회라는 어용국회를 만드는데 일조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