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원지쟁 (문단 편집) === 국회의 정쟁 === 9월 5일, 위안스카이에 의해 무산된 헌법제정 운동이 재개되어 9월 13일 헌법기초위원회가 천단 헌법 초안의 취지를 설명하고 초독하였다. 9월 15일부터 1917년 1월 10일까지 24차례에 걸쳐 심의회가 개최되고 1월 26일부터 제2독회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회 폐회 기간 위원회 설치를 통한 국회 직권 대행 조항 폐기, 대총통 긴급명령권 폐기, 의원의 국무원 겸임 금지 등이 삽입되었다. 또한 유교를 국교로 정하는 문제와 각성 자치를 두고 국회 내부에서 정쟁이 벌어졌다. 구 국민당은 전 참의원 의장 장계를 중심으로 1916년 9월 9일 400명의 의원을 모아 헌정상각회를 조직하였다. 구 국민당 내부에는 [[장쥐]], [[왕정팅]] 등 [[호국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온건파들로 구성된 객려파, [[린썬]], [[쥐정]] 등 호국전쟁에 참여한 급진파로 구성된 병진구락부, 구 진보당 출신으로 손홍이, 정세택 등 호국전쟁에 참여한 도원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구 진보당은 국회 회복 이후 부당주의, 즉 정당이 필요없다는 주장 하에 정당을 구성하지 않고 [[량치차오]] 산하의 헌법연구회와 탕화룡 산하의 헌법토론회로 갈라졌다. 이들은 연구계라고 불렀는데 연구계 소속 국회의원들은 150명 정도가 되었다. 그 외에 10여개 소수정당이 있었는데 대개 돤치루이 지지파이거나 돤치루이 어용정당이었다. 돤치루이는 아예 자신의 입맛대로 움직이는 3당을 조직하려 했으나 별로 도움이 되진 않았다. 구국회 회복 이후 1916년~1917년 사이 헌정상각회 객려파와 연구계, 북양군벌 소속의 독군들은 [[돤치루이]]를 지지했지만 헌정상각회 도원파와 병진구락부, 남방의 실력자들은 대총통 [[리위안훙]]을 지지했다. 돤치루이 반대파가 350석, 돤치루이 옹호파가 340석, 중립이 30석 정도를 차지하였다. 헌정상각회는 헌법에 성헌을 포함시켜 각성의 성장을 민선으로 선출함으로 북양군벌을 견제하자고 주장했으나 당연히 북양군벌과 연구계는 이런 국민당의 주장에 반대했다. 또한 헌법 연구회는 유교의 국교화를 지지하였으나 헌정상각회는 유교의 국교 지정에 대해 반대했다. 쌍방의 쟁론은 격화되어 국회 내부에서 주먹다짐이 벌어지는 형국이었다. 결국 유교에 대해서는 <국민 교육은 [[공자]]의 도를 가지고 수신의 모범으로 삼는다>는 조항을 <중화민국 국민은 공자를 존경 숭배하고 종교 신앙의 자유가 있으며 법률에 의하여 어떤 제한도 받지 않는다>로 수정하였고 각성 자치에 관하여 16개조 초안이 추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