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원지쟁 (문단 편집) == 배경 == 1915년 중화민국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홍헌제제]]를 단행하여 황제에 즉위하려 했지만 [[호국전쟁]]이라는 전국적인 반발에 부딪쳐 몰락하고 급병으로 사망했다. 뒤를 이은 대리총통 리위안훙은 구국회와 임시 약법을 복구하고 국무경 돤치루이를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돤치루이 내각은 위안스카이가 제정한 여러 악법을 폐지하고 내각 개조를 요청했다. 리위안훙은 돤치루이에게 남방의 인사를 입각시켜 남북 화해 분위기를 조성할 것을 제안했고 돤치루이도 이에 동의하였다. 1916년 8월 21일 중의원에서 돤치루이의 총리 임명안은 찬성 407대 반대 6이라는 압도적인 지지 속에서 통과되었고 참의원도 찬성 187대 반대 6의 압도적 지지를 보냄에 따라 돤치루이는 손쉽게 국무총리에 임명되었고 돤치루이 내각이 출범했다. 돤치루이는 장군과 순안사의 명칭을 도독과 성장으로 바꾸고 [[차이어]]를 사천도독, [[탕지야오]]를 운남도독에 임명하여 서남의 실력자들을 달랬다. 하지만 [[리례쥔]] 등 국민당원들은 배제되었으며 용제광의 경우, 광동독군에 임명되었으나 [[루룽팅]]이 용제광을 무력으로 축출하여 스스로 도독에 앉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회 내부에는 구 국민당과 구 진보당 강경파로 구성된 헌정상각회와 구 진보당으로 구성된 연구계가, 정부 안에서는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 돤치루이와 그 위세를 우려한 대총통 리위안훙, 부총통 겸 강소도독 [[펑궈장]] 연합의 충돌이 시작되면서 중화민국 정계는 혼란에 빠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