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여 (문단 편집) == 군사 == [include(틀:역대 한국의 군사조직)] ||[[파일:attachment/부여/buyo.jpg|width=100%]]|| || [[중국]] [[지린 성]] 박물관에 전시 중이던 부여의 철 찰갑과 철검. [[http://www.koreanhistory.org/webzine/read.php?id=169&pid=1&cid=637&offset=&gb=&mgb=&wgb=&sgb=&mlb=&loc=&sec=&find=&afind=&sort=&array=&gubun=&rm=y|#]] 지금은 [[동북공정]]의 영향인지 사라졌다. || ||[[파일:attachment/부여/bus.png|width=100%]]|| || 부여 철검의 다른 사진. || ||[[파일:부여 유수 노하심 유적 출토 갑옷.png|width=100%]]|| || [[https://blog.naver.com/dndudwp99/221270349585| 이미지 출처 ]] || 북방 지역의 평원에서 기른 말로 인해 기마술이 발달했고, 중기 이후 철기를 사용했다. 부여는 중국과 특히 긴밀한 군사적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중국 입장에서는 [[고구려]]와 [[선비족]]의 연계가 위협이 될 수 있었고, 부여 입장에서도 [[고구려]]와 주변 기마 민족들이 부여에 적대적이었기에 양국의 이해 관계가 잘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물론 몇 차례 중국과 부여의 충돌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나, 매우 적었던 데다 충돌 시에도 부여의 군사력은 중국에 결코 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서 평가하기를 "그 나라(부여)는 매우 부유하고, '''선조 이래 남에게 패해 본 일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위 [[한사군]]과는 2차례의 충돌이 있었다. [[111년]]에는 7,000명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낙랑군]]을 공격하였고, [[167년]]에는 부여 왕이 직접 2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현도군]]을 공격했다. 위의 사례는 정말 돌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어서 왜 대립했는지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 직후에서 멀지 않은 120년과 174년에 부여에서 오히려 중국에 복속하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단순한 약탈은 아니고 무언가 정치적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무력 수단을 동원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중국과 대립하는 관계 일변도는 아니었다. 《[[후한서]]》에서는 111년의 침공을 (부여의 침공으로서) '처음'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 큰 대립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부여에 대해서는 굉장히 우호적으로 서술하여 '식량이 모자라 주변을 털고 다닌다'고 기술한 고구려와는 차이가 있으며, [[관구검]]이 고구려 [[동천왕]]을 공격할 때 부여에서 식량을 얻어가는 등 중국을 지원한 사례도 존재한다. [[선비족]]과의 충돌도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세기 중반, [[단석괴]]가 선비족을 통합하고 부여, 오손, 정령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확인되며, 부여를 끝장낸 285년, 346년의 [[모용선비]] 침공이 대표적이다. 서진의 무제 [[사마염]]이 부여인 노예 매매를 금지시키고, 부여로 되돌려보낸 일화도 고려하면 기록이 안된 모용선비족의 약탈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동한 초기에 [[읍루]]를 복속시켰으나 3세기 초 읍루가 부여의 지배권에서 이탈하면서 읍루와도 전쟁을 벌였다고 한다. 다만 읍루인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다시 복속시키는 것은 실패했다. 부여 왕이 사망할 때 부여가 동한측으로부터 '옥갑(玉甲)'을 받아갔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 일부 [[환빠]]들이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금루옥의(황금실과 옥으로 짠 수의)를 한나라로부터 조공받은 것이며, 부여는 따라서 황제국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거짓이다'''. 일단 《삼국지>》<위서> 동이전에는 부여가 중국에 속(屬)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부여가 현도군에서 옥갑을 받아갔다고 되어 있지, 조공 등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 당연히 황제국이 타국에 속할 리는 없는 노릇이므로 일단 관계 설정 자체가 거짓이다. [[http://nestofpnix.egloos.com/v/3834609|링크 참고]]. 한편 금루옥의 관련해서 규정이 있는 것은 《후한서》 <예의지> 하권이다. 여기서 인용한 <한구의>를 보면, >① 漢舊儀曰:「帝崩,唅以珠,纏以緹繒十二重。以玉為襦,如鎧狀,連縫之,以黃金為縷。 ② 諸侯王、列侯、始封貴人、公主薨,皆令贈印璽、玉柙銀縷;大貴人、長公主銅縷。(《후한서》권 96 <예의> 하). 동한의 황제가 입는 수의로 규정된 것은 금루옥의가 맞지만(각주의 ①), 그 뒤에 등장하는 규정에 따르면 제후 왕 등은 은루옥의(은실과 옥으로 짠 수의)를, 대귀인과 장공주 등은 동루(옥의)(구리 실과 옥으로 짠 수의)를 입는 것으로 되어 있다(각주의 ②). 그러니까 '''실을 금으로 짜는 것이 황제의 규정일 뿐 실만 다르면 옥의는 제후 왕을 포함한 황제 이하의 여러 인물들이 입어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물건이었던 것'''이다(그리고 그렇다면 부여 왕은 형식상 제후 왕의 격식에 따라 수의로 은루옥의를 입었을 것이다). 따라서 환빠들이 부여가 황제국이라고 주장했던 옥갑 관련 사료는 오히려 부여가 동한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여서 동한의 예법을 높은 수준에서 이해하고, 동한에 제도상 복속해 있었음을 드러내는 사료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부여가 [[한나라]]에 속했다는 말이 [[중국]]의 속국이나 지방 정권이라는 뜻이라는 게 아니다. 이는 부여가 중국과 동맹을 맺고, 교역을 하기 위해 명목상 칭신을 하는, 당대의 외교적 관례를 잘 알았다는 의미다. 자세한 건 [[조공]] 문서 참조. 물론 이런 것과 관계 없는 순수한 연구자라면 부여가 한나라의 국제 질서에 속하여 동한에 대해 제도적으로도 충분히 지위를 보장받았다고만 알고 넘어가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