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시도 (문단 편집) === 신 막부의 무사도 === [[무로마치 막부]]에 들어 이러한 무사도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일단 신흥 비귀족 사설무장세력인 악당이 발호하면서 뒤를 치거나 기습해도 이기는 게 장땡이라는 풍조가 생겼다[* 다만 무로마치 막부보다 훨씬 이전의 겐페이 전쟁 때에도 미나모토 가문과 다이라 가문의 무사들은 서로를 향해 속임수나 기습을 태연하게 사용했다.]. 또한 하급가신인 호족이 쿠데타를 일으켜 상급자인 귀족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일도 빈번히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무사도를 지키던 귀족가문들이 하극상으로 많이 멸절당했고 본래 무사도와 인연이 없는, 혈통이 낮은 가문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일도 자주 생겼다. 그리고 무사도에 최종적으로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전국시대로, 혼란스러운 전란의 시대에는 무엇보다도 승리와 생존이 우선시되었으므로 과거와 같은 1대1 기마무사간 일기토같은 건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지배층 간의 군비경쟁이 극한까지 치달아 중무장한 아시가루들을 통솔할 무사의 고용수요와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무사도는 사치로 여겨야 했다. 대표적인 예가 가문의 주군 대신 실권을 잡았는데 [[번국]]인 자기 지역에는 [[태수]] 관직이 없는 것도 모르고 태수를 자칭할 정도로 막 나갔던 [[오다 노부나가]], 그리고 [[아케치 미츠히데]]를 정리하고 태정대신 관백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와카슈도]](若衆道) 같은 지배층 문화를 하나도 모르는 문맹 하인 출신이었다. 그만큼 당시 일본의 지배층은 교토 조정에 있는 전통적 무사도의 소양을 갖춘 귀족들과는 별 관련이 없었던 것이다. 이 혼란을 정리하고 등극한 [[에도 막부]]는 사회 안정화를 위해서 소수정예 무사도의 전통을 부활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최소 50만 단위에 달하는 하급무사들을 모조리 해고해서 평민으로 되돌려버렸다. 또한 당시 무사들이 행하던 사적 제재인 [[부레이우치|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 斬捨御免) 또는 [[부레이우치]](無礼討ち)도 정식 결투의 요건에 맞지 않으면 못하게 막았다. 사무라이 둘이 서로에게 발검을 하면 둘다 처벌할 정도로. 해서 [[에도 시대]] 도성에서는 오히려 사무라이들이 무사도에 맞지 않게 시비를 거는 평민을 피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사무라이 계급은 특별한 일 없이는 영주가 기거하는 성 인근의 번화가(조카마치, 城下街)를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평화시대에 사무라이들이 반란 따위를 꾀할 싹 자체를 없애버리고자 이들을 묶어놓은 것이다. 게다가 원래부터 금수저로 격 높은 사무라이거나 가산이 많은 극히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에도 막부]]시기 내내 사무라이들은 월급쟁이로 빈곤한 삶을 살았다. ''''평민은 숨만 붙여 놓는다''''는 일본의 전근대식 통치방식은 하급사무라이에게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 따라서 위의 다양한 이유에 따라 1)어차피 가는게 더 힘든데 2)억지로 갔다가 잘못 걸리면 안 그래도 먹고살기 힘든데 최소 감봉, 최대 사형+멸문인 위험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만약 [[부레이우치]]를 하지 않았다는 소문만 나더라도 사무라이에게는 처벌의 빌미가 되었지만, 거꾸로 사무라이가 상대를 죽였을 경우 (1)반드시 이것이 정당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할 증인이 필요했고 (2)전후를 기록한 서류를 제출해야 했으며 (3)사용한 칼은 증거품으로서 일시적으로 압류되었고 (4)얼마간의 자택근신을 명령받았다. 만약 증인이 없을 경우 단순한 살인이라고 여겨져 할복을 명령받거나 심각할 경우 참수형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노동력=국력이라고 여겨져 소중한 일손을 죽여 낭비하는 것을 막기 위한 막부와 각 번들의 정책의 일환이었고, 평화시대에 칼 휘두르며 치안을 악화시키는 행위에 학을 뗀 막부의 대처법이기도 했다. 이것을 이용하여 에도 시대 평민들은 사무라이를 놀려먹은 다음 사무라이가 자신에게 칼을 뽑기 전에 신속하게 도망치는 일종의 [[치킨 레이스]]가 유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싸우지 않는다고 평민이 처벌받는 일은 없기 때문에 발이 빠르다면 해볼 만했다.] 그러나 이미 전국시대를 거친 당시에는 무사도가 역사상 가장 쇠퇴해있는 상태였고 여기에 사무라이 본인들도 전쟁이나 무사도가 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무라이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하여 주군을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비열한 수를 써도 되는게 무사도라고 왜곡하거나, 그저 죽지못해 안달하는 것을 무사도로 포장하기 시작하였고 이 대표적인 예가『[[하가쿠레]](葉隠)』다. >'''무사도는 죽는 것이라고 보았다 (武士道と云ふは死ぬ事と見付けたり)''' - 『[[하가쿠레]](葉隠)』[*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에도 막부 시절 사람인데다 사무라이 계급도 아니었고 전쟁은 커녕 군인 생활도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책의 내용은 엄연히 작가의 창작이다.] 물론 이러한 무사도 왜곡은 일본 내에서도 식자층에게 미친듯이 까였고, 에도 막부도 주군이 사형을 선고하면 이것을 달게 받아야하는 죠이우치(上意討ち)[* 그 밖에도 주군의 명을 받아서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도 포함된다.]로 화답한다. 또한 주군에게 불충을 저지르면 할복. 죄질이 악랄한 경우는 참수에 재산몰수/작위박탈/폐서인 콤보를 작렬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해서 다른 건 몰라도 막부에게 개길 가능성만큼은 철저하게 제거해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부와 하급 사무라이간의 의식 차이가 컸고 그래서 논란이 벌어진 사건이 추신구라 사건이다.] 막부의 지배를 받는 번들도 마찬가지로 사무라이들이 주군을 배신하거나, 태어났던 번을 떠나 다른 번으로 옮겨가는 것(탈번)을 시도한 사무라이들을 처형해서 지배층인 사무라이들의 이탈을 철저하게 막는다. 심할 경우 탈번으로 번을 떠났음에도 추격대를 보내 탈번한 사무라이를 살해했다. 심지어 해당 사무라이들이 떠나는 것을 알고도 막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도 처벌했다. 이후 개화기 시기 사무라이들을 지배하는 번의 영향력과 힘이 줄어들어 탈번을 막지 못하게 되자 사무라이들이 속속 탈번하게 된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사카모토 료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