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소산성 (문단 편집) === 성벽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부소산성의성벽.jpg|width=100%]] }}} || || {{{#fbe673 '''부소산성의 성벽과 사용 시대'''}}} || 부소산성의 성벽 구조를 두고 발굴하기 이전에는 백제의 왕성은 이중성 구조를 취한다는 견해가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부소산성을 조사하여 내부 내성 구간의 축조시기는 통일신라시대이고 일부 구간은 조선시대임을 확인했다. 그래서 백제 왕성의 특징이 이중성 구조라는 견해는 사장되었다. 참고로 [[웅진|웅진기]]의 왕성인 [[공산성]] 역시 초창기에는 이중성이라고 추정하였지만, 발굴조사를 해보니 원래 백제 토성(또는 토석혼축성)이 있었다가 조선시대에 작게 개축하는 바람에 이중성처럼 보였을 따름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부소산성의판축.jpg|width=100%]] }}} || || {{{#fbe673 '''부소산성의 남벽의 판축'''}}} || 부소산성에 남은 사비기의 성벽구간에서는 [[한성|한성기]] 이래로 내려오는 백제 특유의 판축구조가 확인되었다. 백제 [[토성(동음이의어)#s-2|토성]]의 특징 중에는 영정주(永定柱)를 사용했다는 것이 있다. 부소산성에서는 그러한 영정주, 다시 말해 판축을 위한 틀을 만들고 고운 점토로 판축하는 기법이 남아 백제의 성곽 축조 방식을 추정할 근거를 남겨 주었다. 사실 판축으로 쌓았다면 영정주를 박은 흔적(영정주공永定柱孔)이 있음은 당연하다. 다만 고구려나 신라의 판축에서는 영정주의 흔적이 있는 곳도 있지만 없는 곳도 많다. 그래서 위 사진처럼 비교적 굵직한 영정주가 횡, 종방향으로 박힌 점토로 판축한 성을 흔히 백제의 토성으로 추정한다. 비단 부소산성뿐만 아니라 한성기 백제의 왕성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을 비롯하여, 백제 옛 땅의 백제와 관련된 여러 토성을 발굴한 조사에서도 이러한 기법들을 사용한 흔적이 나왔다. 특히나 부소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도 주요한 거점으로써 재사용하면서 아예 신라가 쌓은 구간이 있는데, 편축기법[* 자연지형과 경사를 활용하여 쌓는 방법으로, 자연경사면을 성벽의 바깥쪽이 되는 부분에 돌을 쌓아서 성벽으로 삼고 돌과 자연경사의 공간을 흙으로 채운다. 쉽게 말해 한쪽만 성벽이 있는 구조라고 보면 된다. 편축의 반의어는 협축이라고 하는데,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성벽의 형태들이 협축이다.]을 사용하여 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면석의 뒷채움부 판축양상을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기본적으로 토성과 석성이라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뒷채움부만 보더라도 사질계의 밝은색 점토로 비교적 대충 채워 넣었기에 백제와 신라의 축성기법은 눈에 띄게 다르다. 백제가 시종일관 토성만 쌓지는 않았다. 토성에 가깝지만 성벽의 외면에 석성처럼 돌을 쌓은 경우도 꽤나 많다. 가장 가까운 사례라면 바로 부소산성과 연접한 [[부여 나성]]이 대표적이다. 체성부 자체는 토성의 축조방식에 충실하지만 외면만 가공한 돌을 면석으로 삼아 쌓아 올렸다. 단순히 면석만 대략 가공하여 쌓은 것은 아니었다. 발굴해보니 면석+잡석 뒷채움+토축체성부 구조로 쌓았음을 알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