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병제 (문단 편집) === 부병제의 유지 노력과 붕괴 === 부병제가 토지겸병과 부병들에게 지워진 과도한 부담, 길어진 전쟁으로 인해 무너져 가고 있다는 것은 사실 당대를 살아가는 황제들이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시기 제대로 된 통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황제들, [[고종(당)|당고종]], [[측천무후]], [[현종(당)|당현종]]은 모두 이 문제를 해결해 보기 위해 노력하였다.[* [[중종(당)|당중종]], [[예종(당)|당예종]]은 그런 통치력 자체를 발휘할 시간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던 황제들이었다. 이들이 어떤 황제들이었는가는 항목 참조.] 이는 물론 부병제가 곧 균전제에 속해 있는 것이며, 균전제는 조용조로 대표되는 수취제도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즉, '''[[균전제]]가 무너진다는 것은 부병제가 무너지고, 즉 당의 통치체계 전체가 무너진다는 것과 동의어나 마찬가지였다.''' [[고종(당)|당고종]]은 구분전과 영업전의 판매 자체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즉 '''토지거래 안하면 지주층이 땅 함부로 못 늘릴 것이다'''는 것. 그리고 측천무후를 황후로 맞이하면서 그 과정에서 당시의 최대 지주계층인 관롱 귀족들을 정계에서 억눌러 그 세를 죽여 놓았다. 몸 상태가 심히 안좋았던 당고종에게 뛰어난 정치력에 출신계층이 낮았던 [[측천무후]]는 이상적인 정치 파트너였다. [[측천무후]]는 혹리들을 대거 기용해 공포정치를 펼첬고, 당고종 시대에 한번 기가 꺾인 [[무천진 관롱집단|관롱귀족]]들은 이에 대향하지 못했다. 또한 황제에 오르는 과정에서 당 황실 세력들의 두 차례에 걸친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해 억제하였다. 즉, '''서족층을 우군으로 삼고 [[문벌귀족(중국)|문벌귀족]]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해 토지겸병도 억제한 것. [[현종(당)|당현종]]은 대대적인 괄호 정책, 즉 도망치고 숨어든 농민들을 파악하고, 이들을 호적에 재등록시키는 정책을 수행했다. 우문융이 재상직까지 올라간 것도 한번에 80만명에 달하는 도호들을 재등록시키는 성과를 올렸기 때문. 또한 부병제 체제 하에서 부병들이 지는 부담을 줄여서, 20세에서 60세까지를 대상으로 하던 것을 50세까지로 감축하였다. 또한 괄호 정책의 원칙인 원래 호적이 올라 있던 지역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도 그만두고 숨어 살던 지역의 호적에 다시 올리는 것을 허가하였다. '''적극적인 괄호 정책과 부병들의 부담 완화를 통해 균전제-부병제 유지를 기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귀족들에게도 부당한 방법으로 취득한 토지를 포기하라는 칙령을 내렸고 불교 사원들을 압박해 그들이 보유한 토지와 농민들을 내어 놓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결국 실패했다. 그 이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전쟁]]이 많았다'''는 것이다. 전쟁 동원은 부병들이 지는 최대의 부담으로, 특히 당고종 이후 시대에는 몇 년씩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예사였다. 이는 저 황제들의 탓도 있어서, [[고종(당)|당고종]]은 항목만 봐도 알 수 있듯 호전적인 황제였고, [[측천무후]] 시기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사해를 삼킬 뜻이 있었다고 평해지는 [[현종(당)|당현종]]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최대 3년, 짧게는 1년 단위로도 교체되곤 했던 변경 방위 임무는 국익이라는 명분 하에 무기한 연장되기도 하였고, 이는 병사로 복무하는 것을 기피하는 풍조를 낳았고, 노비를 대신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 부병의 위상이 추락해, 당현종 시기를 전후로는 수도로 상번한 부병을 일컫는 시관(侍官)이라는 단어를 '''상대를 매도하고 모욕하는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거기다, [[측천무후]]시기에는 당시의 [[문벌귀족]]들은 때려잡았지만 서민지주층, 즉 서족층이 성장했고 불교 사원이 측천무후의 후원을 받으며 급격히 그 수를 늘려가 이들이 [[측천무후]] 말기쯤 되면 '''그 세가 매우 강력해진다.''' 이들도 토지겸병과 도호 발생의 주 원인이었던 만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 [[현종(당)|당현종]]은 초기에는 균형을 잡으며 적절히 억제했지만 집권 중기가 넘어가면서 '''정책 수행의 의지가 부족해졌다.''' 그 결과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마지막 시도인 [[당나라군|확기(彍騎)]]도 만족스러운 효과를 내지 못하자 결국 '''장정건아제'''를 실시하면서 당 후기의 군제체제로 넘어가게 된다. 이로인한 군사적 약화를 극복하기 위해 [[현종(당)|당현종]]은 대대적인 군사개혁을 실시한다. 군진체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번진]](藩鎭)과 [[절도사]]가 등장'''하게 되어 [[안사의 난]], [[오대십국시대]]로 이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