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벽루 (문단 편집) == 상세 == 원래는 [[고구려]] 시대인 393년에 창건된 사찰인 [[영명사]](永明寺)[* 영명사 자체는 [[일제강점기]]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전소되어 버렸다.]에 부속된 정자였는데, [[임진왜란]] 때 [[평양부]] 전역이 전란으로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중건하여 현재에 이른다. 정자의 현판은 [[조선]] 후기 [[평양부]]의 서예가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 1772-1840)이 썼다.[* 조광진이 쓴 부벽루 현판은 당대의 유명한 문인인 추사 [[김정희]] 역시 감탄하였다고 한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4 - 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 창작과 비평사, 2011에서 인용.] 원래 이름은 [[고구려]] 시기에 건립된 이래로 영명사의 이름을 따서 '영명루(永明樓)'로 불렸는데, [[고려]] 중엽인 12세기에 [[평장사]] [[이오(고려)|이오]]가 정자의 풍경이 마치 [[대동강]]의 푸른 물결 위에 떠 있는 듯하다고 하여 오늘날의 '부벽루(浮碧樓)'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예로부터 부벽루 및 청류벽을 중심으로 한 주변과 부벽루에서 바라본 대동강변의 풍경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여 '평양8경' 중 하나인 '부벽완월(浮碧玩月)'[* 부벽루에서 바라본 보름달의 풍경.]로 꼽히기도 하였으며, [[진주시|진주]] [[진주성|촉석루]], [[밀양시|밀양]] [[영남루]]와 함께 조선 3대 정자에 속하기도 했다. [[정지상]], [[김황원]], [[이색(고려)|이색]], [[김시습]], [[김정희]] 등의 많은 문인들이 방문하여 부벽루의 풍경을 소재로 많은 시를 남겼고, 현재 부벽루에는 이들의 시가 수많이 걸렸다. 현재 [[북한의 국보]] 제 17호로 등록되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옛 영명사 자리에 요양소가 세워졌기 때문에 1998년 기준으로는 일반 관광객의 출입이 제한된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