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마민주항쟁 (문단 편집) === 마산에서의 전개 === 부산에 [[대한민국 육군|육군]]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의 2,000여 명의 병력이 투입되었지만 시위는 오히려 부산을 넘어서 [[마산시|마산]]까지 번졌다. 10월 18일 [[경남대학교]] 학생 1,000여 명이 기동 경찰 300여 명과 대치하다 투석전을 벌였고 3·15 의거탑에서 1,000여 명이 [[스크럼]]을 짜서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 및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는 등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날 저녁부터는 학생들과 시민 수천 명이 시내 중심가를 메우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 대규모 군중 시위를 전개하였다. 마산의 시위는 한층 더 격화되면서 민주공화당의 당사, 파출소, 방송국이 불타고 파괴되었다. 이에 인근의 [[창원시|창원출장소]], [[진해구|진해시]], [[함안군|함안군]] 등지에서 경찰 병력이 넘어오고 2개 중대의 군인까지 투입되어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경남대학교는 18일부터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으나 19일 학생들과 시민들의 경찰 차량 방화, 파출소·언론기관·관공서가 불타는 등 공권력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다. 이 시위는 대학생과 일부 고교생은 물론, 노동자, 폭력배, 구두닦이, 접객업소 종업원 등 도시 하층민들이 대거 가세하여 경찰, 군인과 충돌하면서 시위 강도는 한층 격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산의 항쟁이 수출 자유 지역 노동자와 고교생까지 합세하여 더욱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10월 20일 0시를 기해 마산시와 창원출장소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육군과 경찰 뿐 아니라, [[대한민국 해군]]의 주요 기지와 부대들이 위치한 진해 지역에선 [[해군]] 육상 지원부대 근무자들까지 유사시를 대비해 시위 진압 등의 훈련을 급하게 하기도 했다. [[해군사관학교]]에서 근무하던 어느 예비역 [[수병]]은 전역이 코앞이던 와중에 난데없이 [[샘브레이]]와 [[당가리]] 대신 잔뜩 실어와 던져준 민무늬 작업복 입고 힘든 시위 진압 훈련을 며칠 동안 하느라고 날벼락을 맞았다고 증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