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봉천군벌 (문단 편집) === 국민정부 시절 ===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40601044132665.jpg|width=300]] || || [[장쉐량]]과 [[장제스]] || 일단 [[동북역치]]로 명목상 국민정부에 속하게 된 장쉐량이지만 다수의 군벌들이 그렇듯이 깃발만 국민당으로 바꾸었지 실질적으로는 기존의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1928년 장쉐량은 봉천군을 동북변방군으로 개칭하고 대대적인 정편 작업에 들어갔다. 군단과 군,사단 편제를 폐지하고 모든 부대를 '국방여단'으로 통일했다. 7개 방면군 50개 군 100만명에 달했던 봉천군은 정편 작업 이후 33개 보병여단,6개 기병여단,8개 포병연대,5개 공병대대,2개 치중대,9개 헌병대로 조정된다. 각 여단은 3개 연대로 구성됬으며 연대 직할로 기관총중대와 박격포중대,평사포중대,통신중대가 있었다. 동북변방군 국방군과 각 성마다 성방군이라고 하여 토비 진압을 당담하는 치안병력까지 합치면 총 병력이 25만명 정도였다. 이 시기 동북변방군 해군은 대소 전함 21척 수병 3,300명 총배수량 3만 2천톤을 유지해 이전 시기의 규모를 어느정도 유지한다. 해군 항공대와 해군 육전대는 3개 대대 2,000명이었다. 동북변방군 공군은 5개 대대로 구성됬으며 270대 항공기를 보유해 여전히 중국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 출처는 권성욱의 저서 "중국 군벌전쟁" 5부 40장] 1929년 군사력을 감축하여 교육과 경제성장에 투자하자는 [[편견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는 장제스가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것이었고 국민정부에 합류한 각 지방의 군벌들은 장제스에게 반발하여 [[반장전쟁]]을 일으켰다. 1929년 2~3월, 광서파의 [[리쭝런]]과 [[바이충시]]가 [[1차 장계전쟁]]을 일으켰고 5월에 펑위샹이 [[1차 장풍전쟁]]을 일으켰다. 장쉐량은 일단 중앙옹호를 타전하며 봉천군벌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펑위샹을 견제하기 위해 옌시산, 장제스와 손을 잡는다는 방침을 잡았으나 반장파에 합류하는 선택지 역시 고려했다. 이때 만주의 경제적 위기가 심화되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중동로 사건]]을 일으켰다가 [[바실리 블류헤르]]가 지휘하는 [[붉은 군대]]에게 [[봉소전쟁]]에서 개패듯이 두들겨맞기도 했다. 1930년에는 반장전쟁의 절정인 [[중원대전]]이 발발하였다. 그때까지 장쉐량은 장제스와 반장파 사이에서 유리한쪽을 가늠하며 어부지리를 노리고 있었다. 장제스 측이 승기를 잡자 장쉐량은 중앙옹호를 통전, 동북군은 관내진출을 단행하여 베이핑과 텐진을 신속히 장악하였다. 반장전쟁 이후 장쉐량은 국민혁명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국민정부의 2인자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단물을 오래 누릴 수는 없었다. 화북지방에 개입하면서 동북군의 역량이 분산되었고 본거지인 만주는 그만큼 일본의 야욕과 도발에 취약해졌기 때문이었다. 동북군 내 원로격인 만주구파는 관내진출을 반대하였으나 장쉐량은 개인의 야욕때문에 이를 무시한 셈이 되었다. 1931년 [[나카무라 사건]], [[만보산 사건]] 등 봉천군벌을 도발하기 위한 일본 제국의 음모가 이어졌다. 1931년에는 [[이시와라 간지]] 등의 주도로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봉천군벌은 어이없게 몰락하였다. 보경안민을 주장하는 만주 구파를 무시하고 중동로 회수와 관내진출에 나서던 장쉐량은 관동군을 상대로 부저항주의를 취했고 결과적으로 1만 5천명에 불과한 관동군에게 만주를 허망하게 잃으면서 전국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장쉐량의 봉천군벌 잔당은 서쪽의 열하성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일본 제국은 만주 구파를 포섭하여 [[선통제]]를 옹립, [[만주국]]을 선포하였다. ||[[파일:서안사건 장쉐량.jpg|width=100%]]|| || 서안 사건 당시의 장쉐량과 동북군의 장령들 || 1933년 [[열하사변]]이 발생하였을 때도 장쉐량은 무기력하게 패배했다. 장쉐량은 [[왕징웨이]] 등 전국의 요인들의 비난을 받았고 사직을 통전, 유럽으로 외유를 떠났다. 이때 [[갈레아초 치아노]], [[베니토 무솔리니]], [[아돌프 히틀러]] 등을 만나 [[파시즘]] 뽕에 빠지게 되었다.(...) 1934년 귀국한 장쉐량은 서북 초비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장쉐량이 부여받은 임무는 [[제5차 초공작전]]으로 개박살나서 [[대장정]]에 오른 섬서성의 [[중국 공산당]]을 토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쉐량은 공산당 토벌보다는 본거지인 만주 탈환을 하고 싶어했다. 더욱이 공산당의 완강한 저항에 큰 피해를 입게 되자 초공작전에 더더욱 거부감을 가졌다. 이에 장제스의 중앙정부 강화 정책에 불만을 품던 섬서성 군벌 [[양후청]]과 합세하여 초공 독전을 위해 찾아온 장제스를 감금하는 [[서안 사건]]을 일으켰다. 서안 사건은 어찌어찌 평화적으로 해결되어 2차 [[국공합작]]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다 잡은 공산당을 풀어주었던 장쉐량은 가택연금에 처해졌고 양후청은 외유를 떠나야 했다. 봉천군벌의 수장인 장쉐량이 감금당하면서 봉천군벌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었고 장쭤샹 등 살아남은 원로들도 야인으로 살거나 장징후이처럼 일본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하면서 봉천군벌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장제스가 접수한 동북군 부대들은 1934년 장제스가 추진한 60개 사단 정편 계획에 포함되어 개편사단으로서 중국군 중앙군에 흡수되었다. 본거지를 상실하고 지도자도 상실한 봉천군으로서는 중앙정부에 귀속되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국공내전 때도 전향한 부대가 드문 등 이들의 중화민국 정부에 대한 충성심은 현실을 받아들였는지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