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봉신연의 (문단 편집) === [[아노 츠토무]] 비판 === 문제는 국내에 가장 널리 퍼진 판본이 [[아노 츠토무]](안능무)[* [[한국]]에서는 흔히 '안능무'라고 알려졌다. '아노 츠토무'의 [[한자]] 표기(安能 務)를 한국식으로 음차한 것이다.] 판본이라는 것. 아노 츠토무는 봉신연의의 내용이 줄기없이 마구 흘러가는 것을 정비하면서 본인 마음대로 설정을 확립하였다. [[봉신연의(만화)]] 역시 그 판본을 많이 따라가므로 [[한국]] 독자들 대부분은 아노 츠토무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 [[일본어]]판을 [[중역]]한 것이라 [[오역]]이 엄청나게 많다. [[도교]]를 바탕으로 한 [[세계관|배경]] 때문에 [[유교]]에 의해 탄압받기도 했다…고 알려졌지만, 이는 아노 츠토무가 [[일본]]에서《봉신연의》를 번역하면서 퍼트린 성급한 추측에 불과하다. [[아노 츠토무]]의 주장은 이러하다. || 1. 공자가 사상의 뿌리로 삼았던 주공단의 노나라에 비해 태공망의 제나라가 훨씬 성공했기 때문에 1. 태공망이 유학자들을 박대하고 죽이기까지 했기 때문에 1. [[전국시대]]의 패왕들이 태공망의 사상적 후예로 여겨졌기 때문에 1. 태공망 자신이 유학에서 경계하는 괴력난신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유교 세력에게 탄압받았을 것이다. || 그러나 이 주장은 설득력이 낮다. || 1. 특별히 《봉신연의》가 아니라도, 중-근세 시기에 모든 종류의 소설은 유교적 관점에서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 괜히 소설(小說)이라 불렸겠는가? 게다가 소설은 그 자극적인 내용이 문제시되어서 [[금서]] 취급을 받은 사례도 자주 있다. 하지만 소설 대부분이 그러했지 봉신연의만 특별히 경계받지는 않았다. 1. [[공자]]는 [[태공망]]이나 [[관이오|관중]]도 그 나름대로 존중하였다. 물론 유학자들이 태공망의 서적을 일부러 숨긴 일도 없으며, 후대에는 무성왕이라는 칭호로 모셨다. 공자를 문성왕으로 모셔 문무묘라는 시설에서 대등한 지위에 제사 지내기도 했다.[* 물론 무신 자리는 도교 냄새가 많이 나는 태공망에서 유교적 덕목에 충실한 관성제군 관우로 넘어간다.] 1. 그리고 애초에 이전의 학문을 그저 집대성 한[* 이 점이 더욱 아이러니 한 것이 공자는 자신이 유교를 창시했음을 부정하며 그저 과거의 예법을 추구할 뿐임을 주장했는데, 그 과거의 예가 바로 태공망이 개국공신인 주나라의 예법이다.][* 사실 공자의 유교는 원래 은나라의 잡스러운 풍습을 교화했던 것처럼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예법을 바로 세우자는 데서 시작하며(당시 주나라가 무너지면서 춘추전국시대에는 하극상이 심각했고 그로 인해 사회가 매우 어지러웠다.) 주공 단을 성인으로 모시는 이유도 어느 정도는 이 때문이다. 그러니 공자가 주나라와 태공망에 대해 악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다. 주공 단이 덕으로 교화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가 태공망이므로.] 이가 공자인데 은주시대 사람인 태공망이 무슨 놈의 유학자를 어디서 찾아서 어떻게 박대한다는 말인가? 무엇보다 괴력난신의 본가는 은나라지 태공망과는 별 관련이 없다.[* 거기에 더해 애시당초 유교가 도교를 박해할 정도로 중국에서 압도적이었던 적도 없었다. 오히려 유교 쪽은 시대에 따라서는 엄청나게 박해를 받았던 적이 있지만(분서갱유, 문자의 옥 등) 도교는 역사상 그렇게 박해를 받은 적이 없다.]|| 이런 까닭에 아노 츠토무의 주장은 전제 조건부터 잘못된 것이다. 아노 츠토무판 《봉신연의》에서는 중간에 스토리 전개를 끊고 편역자 본인이 직접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유교를 비판하기까지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