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복건사변 (문단 편집) === 장제스의 친정(親征)과 복건정부의 붕괴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iang_Kai-shek_in_1933.jpg]] || || 반란진압 이후 정부군을 사열하는 [[장제스]]. || 당시 중화공화국은 19로군 휘하 5개 사단, 4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주력부대를 푸젠 북부에 배치했으며 일부가 푸저우에 있었다. 장제스는 자신이 직접 진압에 나서는 한편 11월 21일 2로군, 4로군, 5로군 휘하 11개 사단에 출정을 명령했고 이들을 2로군에 배속시켰다. 11월 23일 오전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천밍수, 리지선, 장광나이, 차이팅카이 등 5명을 내우외환의 국난을 불러와 인민을 곤고하게 한 죄를 물어 국민당에서 '영원히' 제명하고 반역죄로 엄벌에 처하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국민당은 일본에 19로군을 돕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자신들이 이들의 봉기를 도운 것이 밝혀질까 우려했던 일본 외무성은 "복건사변은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결코 원조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또 일본인이 그 일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주의하겠다."는 약속을 해주었다. 이 때문에 일본은 정말로 복건사변에 별 관여를 안하게 됐다(...). 다만 일본으로부터 91식 전투기 12대를 도입하긴 했는데 중화공화국이 제대로 저항도 못하면서 나중에 죄다 장제스의 손에 들어왔고 [[중일전쟁]] 때까지 요긴하게 쓰이게 된다.[[https://m.blog.naver.com/minjune98/221180263070|#]] 장제스는 초공작전의 지휘를 [[구주퉁]]에 맡긴 후 자신이 직접 복건사변의 진압에 나섰다. 11월 29일 난징 국민정부가 보낸 비행기들이 귀순을 종용하는 전단을 뿌린 다음에 일제히 토벌을 개시했다. 장제스의 요술방망이와도 같은 공군력의 존재에 19로군은 공황상태에 빠졌고 장제스가 공산당을 족치기 위해 열심히 닦아놓은 도로들은 19로군을 족치는데도 매우 쓸모가 있었다. 정부군은 신속히 장쑤의 금계, 남성, 임천 일대를 통과하여 푸젠 북부에 진입했다. 당황한 인민정부 요인들은 공산당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공산당은 만프레트 슈테른 코민테른 수석군사대표를 비롯한 모험주의적 인물들이 난창, 창사로 이르는 대규모 돌파작전을 주장하고 보구와 [[오토 브라운]]이 이에 반대하여 복건 북부 작전을 주장하는 등 노선 갈등에 휩싸여 있었다. 오토 브라운은 독단적으로 홍군 7개 사단을 복건에 진격시키기로 결정했다. 정치국과 군사위원회도 이에 만장일치로 동의하였고 홍군 1군과 3군을 남평으로 파견했다.[* 장개석비록에 따르면 공산당은 3군, 5군, 7군의 파견을 결정했다가 번복하였다고 한다.] 이는 홍군이 확보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영토, 인력, 물자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홍군은 복건에서 상당한 영토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나 19로군의 붕괴가 생각보다 너무나 빨랐기 때문에 싸움의 대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전진 범위도 그리 넓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은 중화공화국이 그저 군벌할거에 불과하며 항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난, 푸저우의 중공대표를 철수시켰고 12월 12일에는 오히려 천밍수를 반혁명 개량주의자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복건정부는 인민정부도 아니고 혁명정부도 아니며 단지 인민을 기만하는 새로운 유희일 뿐이다. 혁명과 반혁명의 중간에 서서 제3의 길을 찾으려 하는 이런 분자는 필연적으로 무서운 실패를 맛보게 될 것이다." 이후로도 공산당은 푸젠 정부를 돕기는 커녕, 중간파들이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성토하며 오히려 적대시했고 결국 19로군은 정부군의 공세에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잇달아 무너졌고 정부군은 푸젠에 순조롭게 진입, 1934년 1월 1일에 총공세를 시작했다. 1월 5일 5로군 9종대 지휘관 유화정이 4사단, 36사단, 56사단을 지휘하여 푸저우로 들어가는 요충지인 남평을 점령했고 11월 7일 4종대 지휘관 이언년이 3사단과 9사단을 이끌고 수구를 점령하고 푸저우 80킬로미터 밖의 지점까지 진출했다. 유일하게 푸저우 서북쪽 100킬로미터 지점의 고전에서 조일견의 3단이 지형을 이용하여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2종대 왕경구가 이끄는 87사단과 88사단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차이팅카이가 직접 원군을 이끌고 고전을 지키러 달려갔지만 남평과 수구의 함락에 완전히 고립된 것을 안 조일견도 1월 12일에 차이팅카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항복했다. 결국 1월 13일 차이팅카이는 민강을 도하하여 도주했다. 이때 복건정부가 갈 때가 되었단 것을 안 푸젠의 해군이 편을 바꾸어 푸저우를 함락시켰고 이어 하문도 점령당했다. 반란군 지휘관들은 앞을 다투어 투항하였고 [[쑹메이링]]이 협상을 하기 위해 도착하자 하라는 협상은 안하고 항복을 하는 등(...) 19로군은 허망하게 무너져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