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현숙성황후 (문단 편집) === 고려의 입장 === 고려의 입장에서는 민폐를 넘어 온갖 해를 끼쳤을 뿐 이득을 준 것은 전혀 없었다. 원나라에서 기황후가 권력을 잡자 기씨의 오라비였던 [[기철]]과 기원이 그 빽만 믿고 갖은 횡포를 부리는데도 [[부마]](쿠르겐)국이었던 고려에서는 행주 기씨 집안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행주 기씨 집안은 기황후를 든든한 뒷배로 삼아 사리사욕을 채우기에만 열중했다. 기황후의 원 황실내 권력과 위상이 커져가면서 기씨 일족의 횡포와 전횡 역시 날로 심각해졌고, 결국 [[공민왕]]이 즉위하자마자 원나라와 충돌할 엄청난 각오까지 해가며 [[병신정변|고려 내에 있었던 기씨 집안을 싸그리 쓸어버렸다.]] 그 후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펼치자 원나라에 있었던 기황후는 공민왕을 쫓아내고, 덕흥군을 고려의 새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공민왕이 보낸 군대에 의해 패배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최유의 난)[* 이 전투에서 [[최영]]과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맹활약했다.] 한편 기황후가 [[공녀]] 폐지를 했느니 입성론을 막았느니 하는 이야기도 일부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라비가 제4차 입성책동 당시 입성론을 일으키며 고려를 통째로 갖다 바치려고까지 했던 것. 또한 자기가 불리하거나 필요할 때는 권력자에게 또 다른 공녀를 뇌물로 갖다바쳤고, 결국 참다 못한 이곡이 혜종에게 상소를 넣어 공녀 차출을 중지시켰으나 기황후는 오히려 박부카를 시켜서 공녀를 계속 보내라고 독촉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기황후가 공녀들을 계속 원한 이유는 바로 자정원의 재정을 바탕으로 고려 출신의 처녀들을 데려다 길러 원나라 고위층에 뇌물로 선사해 자신과 황태자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인데 그러한 사실은 원나라 말기를 기록한 《경신외사》 등에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 사실로 볼때 기황후는 고려 공녀를 막기는커녕 [[성상납]]을 시키는 사창가 [[포주]] 같은 짓을 저지른 셈이다. >기황후는 고려 미인을 길러 권세가에게 바쳤다. 원나라 수도에서 현달한 고위 관인과 귀족은 반드시 고려의 미인을 얻어야 명가(名家)라 했다. 고려 여인들은 예쁘고 귀여워 사람을 잘 섬겼고, 그 집안에 들면 곧 사랑을 독차지했다. 지정(至正: 1341)년 이후로 궁중의 일을 맡은 사람의 태반은 고려 여인이었다. 이 까닭에 '''[[고려양|사방의 옷차림, 신발, 모자가 모두 고려 제품을 사용했다.]]''' >---- >《경신외사》(庚申外史) 기황후가 권력을 잡는 원나라 말기쯤 되면 고려에 요구하던 무리한 공물 요구가 조금 완화되기는 하지만 이는 원나라 자체가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국력이 약화되어 더 이상 피지배 민족들을 강하게 억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여러 가지 어려운 요구를 하기 어렵고, 본국 관리조차 힘들어졌기 때문에 저절로 여러 요구가 사라진 것이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더 이상 조선에 내정 간섭을 하지 못하게 된 청나라와도 비슷하다. 근데 사실 청나라는 원나라와 달리 국력이 빠지고 나서도 빠진 것치고는 많이 설친 편에 속한다. 청일전쟁 전에도 안 좋은 일이 많았는데 청일전쟁까지 해서 지고 나서도 어느정도 외부국가들에게 설쳐보다가 신해혁명이나 나고 끝났다. 이유는 군벌세력인 위안스카이가 실권을 잡으면서 내부기강을 잡아보려고 여기저기 쑤셔댔기 때문. ] 단지 기씨가 황후로 있었던 시절과 시기가 겹쳐 위와 같은 사실을 왜곡하는 주장이 나온 것일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