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장왕 (문단 편집) === 재위 기간 === [[막리지]]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 체제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보장왕은 [[바지사장|명목상의 국왕]]으로 추대되었기에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이는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형제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라서 사실상 실권이 없이 보냈다고 보는 편이다.[* 권력이 《[[삼국지]]》의 [[헌제]]처럼 거의 없었는지, 나름대로 발언권은 있었는지 정도의 이견은 있지만 적어도 실권은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위 직후 [[당나라]]에 사람을 보내 [[도교]]를 받아들이자는 연개소문의 진언에 따라 당의 [[도사]]를 초빙하여 도교를 장려했다. [[불교]] 측이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한다." 하고 대놓고 디스할 정도로 불교계에서는 반발이 심했다. 현존하지 않는 《[[구삼국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보덕(승려)|성사]]는 원래 [[고구려]] 반룡사(盤龍寺) [[스님]]이었는데, 보장왕이 [[도교]]에 현혹되어 불법을 폐기하자 성사는 방장(方丈)을 날려 [[백제]]의 고대산(孤大山)에 이르렀다. 후에 한 신인이 고구려의 마령(馬嶺)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패망이 며칠 안 남았다"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 《[[구삼국사|해동삼국사》(海東三國史)]]와 같다. >---- >《대각국사문집》 권17 고대산 경복사의 비래방장에서 보덕성사의 영정에 예배함. 그러나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트집을 잡다가 연개소문에게 거절당했다. 결국 누적된 갈등은 폭발하여 [[고구려-당 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645년의 침공은 [[중국]]을 통일한 전쟁영웅 [[태종(당)|당태종]]이 온 국력을 기울여 직접 나선 전쟁이었다. 당군은 [[개모성]], [[요동성]] 등을 일시적으로 점거하는 등 강력한 무력을 보였지만 [[신성]], [[건안성]], [[안시성]] 등 요동 외곽에서 격퇴당하여 초라하게 쫓겨나간다. 고구려는 당과 맞서는 동시에 [[백제]], [[말갈]]과 함께 신라 공격에 열을 올렸다. 신라의 [[김춘추]]는 직접 고구려 [[평양성]]에 와서 역사적인 [[외교]] 회담을 열었으나 실패로 돌아갔으며 똑같이 고구려에 패배의 아픔을 삭히면서 [[복수]]에 몰두하던 [[이세민]]과는 이해가 맞아떨어져 한민족의 역사를 바꿀 [[나당동맹]]이 성사되었다. 이세민 사후에도 계속 고구려와 당나라는 일진일퇴의 소모전을 계속하였고 고구려와 백제, 말갈의 신라에 대한 공세도 이어졌다. 하이라이트 사건은 세 나라의 연합군이 신라 북쪽 33개의 성을 뺏은 사건이다. [[나당연합군]]은 [[미증유]]의 대군을 동원하여 먼저 백제를 기습했는데 백제가 의외로 빨리 멸망하면서(660) 고구려를 양면에서 공격할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661년 당은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수십만 대군을 일으켜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에 일격을 시도했다. 고구려에서는 백제 부흥군, [[왜]]와 연계하여 남쪽의 신라군을 견제하고 [[거란]], 철륵 등과 연계하여 당군을 분산시킨 후 당나라의 대군을 [[사수 전투]]에서 전멸시키는 데 성공했다(662). 이로 인하여 국력이 고갈된 당나라에서는 고구려에 대한 야욕을 재고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 입장에서도 [[백제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남쪽 지역에서 안정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화친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666년에는 태자를 당 고종의 봉선의식에 보내 친선 의사를 보였다. 연개소문의 죽음 이후 [[연남생]]이 [[대막리지]]의 직위를 이었으나 그의 나이는 고작 32세에 불과했고, 부친 연개소문에 재주가 미치지 못하였다. 그렇게 되자 결국 그의 동생들인 [[연남건]], [[연남산]]이 형 연남생의 직위를 탐내면서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연남생이 내분에서 패하여 [[국내성]]에서 항거하다 결국 국내성을 비롯한 [[요동]] 일대를 당나라에 바치면서 [[항복]]했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도 신라에 항복했다. 결국 이러한 치명적인 내분에 힘입어 668년 나당연합군은 [[평양성 전투(668년)|평양성 공략에 나섰다.]]이때 보장왕은 결사 항전을 주장하는 연남건을 물리치고, 연남산과 함께 항복 사신을 보내는 데 찬성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평양이 포위되었을 때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먼저 항복을 청했고, 이때 신라 측 요인으로 참전한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신라)|김인문]]이 왕을 당나라군 [[총사령관]] [[이세적]] 앞으로 데려가 보장왕의 죄상을 열거했다고 한다.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이 단군기원으로는 깔끔하게 50갑자가 지난 3001년이니, 참으로 기가 막힌 역사의 우연이다. 보장왕이 연개소문 일가와 어떤 관계였는지를 두고 여러 [[해석]]이 있다. 일방적으로 연개소문에 휘둘리는 군주였다는 해석도 있는가 하면, 오히려 연개소문이 전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겉으로는 협력하나 이면에서는 대립하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권력은 지키면서 제 역할을 했다는 해석도 있다. 항복 이후에도 연남생처럼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는데도 그걸 포기하고 [[고구려부흥운동]]을 일으키려고 했으니, 현재로서는 전자보다는 후자 쪽에 해석에 무게가 실리기도 하고 [[대중 매체]]에서도 그렇게 그려지는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