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시라이 (문단 편집) === 결과 === 2012년 8월 구카이라이는 [[사형]]에 2년 집행유예형[* 즉 수감 중 별다른 사고를 안치면 자동적으로 2년 후 무기나 장기징역으로 감형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이 형량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많았다. 살인범은 사형에 처하는 게 원칙인 중국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을 면하려면 정말 누가 봐도 우발적인 살인이거나 정상참작의 여지가 극히 커야 하는데 구카이라이는 거꾸로 명백한 계획살인에다가 선처의 여지도 없었는데 사형을 면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정치적인 배려가 들어간 것이다. 구카이라이 재판이 일단락 된 이후 보시라이에 대한 재판도 열렸는데, [[죄수의 딜레마|부부가 법정에서 자신의 형량을 낮추기 위해 서로 불리한 증언을 하는 추태를 보였다고 한다.]] 특히 보시라이는 구카이라이가 문제가 된 왕리쥔과도 내연관계였다고 폭로하고, 구카이라이는 보시라이의 부패행위를 증언하는 등 법정에서 콩가루 부부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다만 위에 언급한 장웨이제 사건에 대해서는 나란히 입을 다물었고 별도의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이 사건으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2013년 9월 결국 보시라이는 부패 혐의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이후 항소도 기각되어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물론 부정 축재로 모은 재산도 모두 몰수.[* 단 아들이 여전히 이전 같은 생활을 하면서 유학까지 다니는 걸 보면 그러고도 남은 재산이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보시라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보시라이는 시진핑과 리커창에 버금가는 위치였으나, 이제는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 다만 앞으로 [[베이징 친청 교도소|수감 생활을 할 고위층 전용 감옥]]은 호텔 못지 않은 시설을 갖추었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 듯. 그의 형량은 이후 고위급 인물의 정치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의 상한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저우융캉]]도 역시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그 와중에 다시는 중국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 둘째아들 보과과 대신, 전처 리단위의 아들로 연을 끊고 살았던 장남 리왕즈가 보시라이의 재판을 돕고 옥바라지에 나서며 관계를 회복했다고 한다. 구이카라이와의 결혼생활이 파탄난 것도 관계 회복에 영향을 줬을 듯. --권력에서 밀려나고 다시 찾은 가족-- 한편 보시라이 몰락의 계기가 된 왕리쥔은 15년형을 받았다. 놀랍게도 2017년 6월 28일 간암으로 가석방됐다. 다만 [[류샤오보]]처럼 간암 말기[* 류샤오보는 사실상 죄수들을 진료하는 의사가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확신을 해서 풀어준 것이고 실제로 출소 후 금방 사망했다. 애초에 류샤오보는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의 지도자로서 탄압받다 죽은 것이고, 보시라이는 단순 권력형 비리범죄라서 서로 클라스가 다른 사람이다. ]에 석방된 것이 아니라 초기에 석방되었고, 장쩌민과 후진타오 등 최고위 지도자들이 머물렀던 휴양처에서 최고 수준의 의료진들에게 극진한 간호를 받고 있다고 한다. 다만 치료가 되면 감옥으로 다시 복귀할 예정이다.~~시진핑: [[이중구(신세계)|살려'''는''' 드릴게]]~~ 한편 구카이라이는 감옥에서 수형생활에 별 문제가 없었는지 2014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지금도 복역중인데, 보시라이와 달리 별다른 질병이 없는 것인지 계속 감옥에서 지내고 있다.[* 다만 중국은 다른 국가라면 가석방없는 종신형 내릴 범죄는 그냥 사형시키고 대신 무기징역이라도 20~25년 복역하면 어지간해서는 다 가석방해준다. 이런 점은 사형제도가 가석방없는 종신형으로 바뀐 것만 제외하고 다른 구공산권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모로 중국과 중국공산당 정치사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 대외정책이 조금씩 강경해지는 것에 대한 우려는 있었지만, 당시 중국공산당의 대외 이미지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등 전문가 지도부가 국익만을 잣대로 치열한 토론을 거쳐 결정을 내린 뒤에는 깔끔하게 승복하는 문화를, 이전투구를 일삼는 우리 정치권은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보수매체에 종종 등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타협을 통해 원활하게 굴러가는 것처럼 보였던 집단지도체제는 사실 공청단과 태자당, 상하이방 사이의 계파간 균형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실제 속은 곪아터지기 직전이었다는 것이 보시라이 사건을 통해 외부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보시라이와 같은 지방 간부가 죄없는 사람들을 수없이 사법살인하고 거액의 재산을 탈취하는데도 중앙에서는 손쓸 도리가 없었고, 명목상 총서기이자 중앙군사위 주석이었던 후진타오는 군부조차 온전히 장악하지 못해 정변 시도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게 백일하에 드러난 것. 거기다 상하이방은 반역죄를 저지른 게 분명했던 보시라이의 직을 거두는 것까지는 합의했어도 그 이상의 처벌은 거부하면서, 시진핑이 한동안 사라지고 당대회가 기약없이 연기되는 등 정국은 극한 대립으로 치닫게 된다. 아무리 이견이 커도 공식석상에서만큼은 일치단결을 과시하던 당의 평소 연출의 허구성을 중국공산당에 가장 우호적인 관찰자조차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