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덕국 (문단 편집) ==== [[검모잠]]의 궐기, 신라에 형식적 귀순 ==== >六月 高句麗水臨城人牟岑大兄 收合殘民 自窮牟城 至浿江南 殺唐官人及僧法安等 向新羅行 至西海史冶島 見高句麗大臣淵淨土之子安勝 迎致漢城中奉以爲君 遣小兄多式等 哀告曰 "興滅國 繼絶世天下之公義也. 惟大國是望, 我國先王以失道見滅今臣等得國貴族安勝 奉以爲君 願作藩屛 > >(670년) 6월, '''고구려''' 수림성(水臨城) 사람인 대형 모잠(牟岑)이 유민들을 모아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대동강|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였다. 그들은 신라로 향하던 중에 서해의 사야도(史冶島, 현재 인천의 소야도)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왕으로 삼았다. 소형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 슬프게 고하였다. >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해주는 것은 천하의 공평한 도리이니 오직 [[신라|대국(大國)]]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고구려|우리나라]]의 선왕은 도의를 잃어 멸망당하였으니, 지금 저희들은 우리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받들어 군주로 삼았습니다. 바라옵건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신문왕조 등에서 발췌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보장왕]]은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갔다. 그러나 남은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를 부활시키기 위해 뭉쳤고 그 중 [[검모잠]]은 초기 [[고구려부흥운동]]의 핵심이었다. 검모잠이 반란을 일으켜 세력을 만들었지만 보장왕이 끌려가 없으니 정통성이 있는 고구려 왕족이 필요했고, 그의 눈에 들어온 자는 서해의 사야도(史冶島, 현재 [[인천광역시]]의 소야도)에 피신해 있던 [[안승]]이었다. 검모잠은 안승을 고구려 3경 중 하나인 [[한성#s-1.2]](漢城)[* [[서울]]을 뜻하는 한성이 아니라, 오늘날의 [[황해도]] 부근의 지명이다. 황해도 [[재령군]] 일대.] 안으로 맞아들여 보장왕의 뒤를 잇는 고구려왕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검모잠의 부흥군은 우군을 만들기 위해 신라에 사신을 보내, "[[신라]]가 원병을 보내어 나라를 되찾는 것을 돕는다면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주겠다"며 충성을 맹세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고구려계 입장에서 신라는 그래도 당나라보다는 덜 원수진 사이였고, 신라 역시 슬슬 당나라와의 [[나당전쟁]]을 준비하던 상황이어서 당나라를 몰아낸다는 목적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구려인들도 그저 신라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협조한 것만은 아니고 이 당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구려 부활이었을 것이므로 윈윈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